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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병자호란 시기 여주지역의 동향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은 발발 50여 일 만에 조선이 후금에게 전쟁의 패배를 인정하며 강화조약을 맺어 일단락되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주화(主和)와 척화(斥和)로 나뉘어 열띤 공방전을 하고 있었지만, 전쟁의 참패는 어쩔 수 없이 주화의 노선을 택하게 하였다. 치욕적인 형제지맹(兄弟之盟)의 조약(1627. 2)을 맺은 조선에서는 이후에도 주화·척화의 논쟁은 그치지 않았으며, 오히려 화친 이후 조선의 조야 여론은 숭명배청(崇明排淸)사상이 강화되면서 척화론이 우세하였다.

이러한 척화론의 분위기는 강원·여주지역에서 모의한 이인거(李仁居)의 역모사건에서도 엿볼 수 있다.1) 이 사건은 1627년 10월에 강원도 횡성 유학(幼學) 진극일(陳克一)과 원주목사 홍보(洪縡)의 상변(上變)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인거는 강원도 횡성 사람으로 정묘호란 당시 맺은 오랑캐와의 화친에 대한 의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곧바로 서울로 향하여 간신들을 처벌하고 적을 토벌하겠다며 여주지역 부자 일가의 군량지원을 받아 거병(擧兵)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이인거의 변란에 대비한 성내 수비 강화에 만반을 기하는 한편, 김류(金瑬)는 역모를 진압할 군대로 예상 진출로 지역 즉, 여주·이천 등지의 군사를 동원하는 방법을 건의하기도 하였다.2)

드디어 이인거와 그 일당이 잡혀 심문하고 처벌하였다. 사건의 전말을 보면, 이인거는 거병하기 전에 감사에 소본을 올려 오랑캐와의 화친에 대한 의분을 토로하며 거병의 의의를 밝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화친의 주동자인 최명길(崔鳴吉)과 김류의 목을 베고 오랑캐를 소탕하여 중흥의 터전을 마련하고자 자신의 아들들과 더불어 횡성현의 장관·출신들에게 전령하여 군병을 모아 거병을 모의하였다고 하여 사형에 처하게 되었다.

당시 이 사건에 대한 실록 기사 말미에 사관의 논이 붙어 있는데, 이 사건은 우습게도 이인거의 무리가 20명도 못 되는 것인데, 원주목사 홍보가 이 사건을 크게 부풀려 보고하고, 진격해 소탕한다는 말로 임금을 속이고 녹훈(錄勳)까지 받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아무튼 이인거의 역모사건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후금과의 화친 이후 조야에 팽배해 있는 숭명배청사상에 힘입어 주화론자들을 처단하고 척화 노선으로 방향을 선회하자는 의론이 강력해지고 있었다. 척화론의 강화는 곧 조선 정부의 태도를 변화시켜 후금의 의심을 사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후금의 2차 침입(병자호란)의 명분으로 작용하였다.

병자호란은 정묘호란 이후 형제지맹에 따른 양국의 평화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양국 간의 갈등이 증폭되면서 일어났다. 조선은 앞에서 살펴봤듯이 비록 치욕적인 형제의 관계를 맺기는 했지만, 화친 이후에도 숭명배청사상에서 여전히 명(明)에 대한 사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해마다 증액되는 세폐(歲幣)의 요구는 전쟁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조선의 경제력으로는 가중한 부담이었다.

후금 측의 입장에서 보자면, 정묘화친 이후에도 조선은 여전히 명과의 외교를 단절하지 않은 채 사대관계를 지속하고, 더구나 조선 내에 주둔하고 있는 명의 장수 모문룡(毛文龍) 부대에게 군량미를 지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후금의 입장에서는 장차 후금이 명과 총력전을 펼칠 때 큰 장애로 인식되어 강력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절실하였다.

정묘화친의 불만, 모문룡 부대의 주둔, 개시(開市)와 국경지역에서의 마찰 등으로 인하여 양국은 갈등 관계가 증폭되어갔다. 그러나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만주를 평정하고 명의 요동지방 및 내몽고마저 복속시키며 그 세력이 더욱 강성해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조선과의 관계를 재정비하기를 요구하였는데, 곧 형제의 관계에서 ‘군신지의(君臣之義)’의 관계로 개정할 것과 세폐의 증액 등을 골자로 하여3) 조선을 속국시하는 내용의 국서를 보냈다.

이에 인조(仁祖)는 청의 사신을 인견하지도 않은 채 국서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팽배한 척화주전의 기운으로 결전의 노선을 채택하고 8도에 결전을 다지는 내용의 유문(諭文)을 내렸다. 1636년(인조 14) 3월 1일에 내려진 이 유문에서 인조는 방비를 굳게 하고 충의의 군사를 모집하여 군사력을 증강시켜 전쟁에 대비하도록 명령하였다.4) 그리고 조선 정부는 적의 침입에 대처할 군비나 대책이 마련되어 있지 못한 채 의주를 비롯한 서도(西道)에 병기를 보내는 등 결전의 뜻을 드러냈다. 한편, 동년 4월에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숭덕(崇德)이라는 연호 개원과 더불어 황제 칭호를 사용하면서 그 위세를 드러낸 청 태종은 조선의 이러한 결전의 속내를 알아차리고 조선 정벌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드디어 청 태종은 1636년 12월에 스스로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다시 조선을 침입하였다. 청의 군사력은 잦은 정복전쟁의 경험으로 10년 전의 정묘호란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성해졌다. 청군의 주력병은 철기병(鐵騎兵)이었는데, 철기병은 추위를 이기고 화살을 막기 위하여 “안에는 흑표(黑豹), 겉에는 중개(重鎧)를 입고, 가슴에는 거울[鏡]로 가렸다.”고 한다. 이들의 주무기는 강궁(强弓)과 장창(長槍)이었지만, 홍의포(紅衣砲)·장군포(將軍砲) 등의 보병의 화력지원과 성벽을 파괴할 각종 기구를 운송하는 치중부대(輜重部隊)가 뒤따르고 있었다.5)

청 태종은 조선정벌군을 심양에 집결시켜 지휘부서와 침략계획을 세우고 12월 2일에 출성하였다. 9일 압록강을 건넌 예친왕(豫親王) 다탁(多鐸)은 선봉 마부태(馬夫太)에 명하여 바로 서울로 진격케 하였다. 마부태는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이 수어하고 있는 백마산성을 피해 밤낮으로 급행하여 심양을 떠난 지 10여 일 만에 서울에 다다랐다. 조선 정부는 12일이 돼서야 임경업의 장계(狀啓)를 통하여 청군이 침입했음을 알게 되었으며, 이어 안주-평양-개성을 통과하였다는 보고가 줄이어 올라왔다. 이에 빠른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적병이 개성을 지났다는 장계를 받고는 파천(피난)을 논하기에 이르렀다. 신주(神主)와 빈궁 및 늙은 신하들을 먼저 강화도로 옮기고, 죄수의 사면과 파직한 문무관을 다시 서용할 것을 명하였다.6) 인조는 최명길을 적진에게 보내 강화를 하자는 지연책으로 시간을 벌고 곧 이어 남대문을 나와 강화로 가려다가 마부태의 적병이 서울에 이르렀다는 보고로 인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난하게 되었다.7)

한편, 최명길의 지연책과 소수병력의 저항으로 일시 주춤했지만, 심양을 떠난 지 10여 일 만에 서울에 도착한 선봉장 마부태는 이미 인조와 대신들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사실을 깨닫고 급히 추격하여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는 동시에 남한산성 밑에 주둔하였다. 이어 뒤쫓아오던 청의 후속부대도 16일에는 모두 남한산성에 도착하여 남한산성 주위에 목책(木柵)을 세워 포위망을 구축하였다.8)

원래 남한산성의 방비는 광주진영(廣州鎭營)에 소속된 여주·이천·양근·지평·파주 5개읍의 군사와 강원도 원주와 경상도 안동·대구 등지의 군사를 관하에 소속시켜 남한산성 주변의 여러 진을 총괄 지휘하도록 되어 있어 병력규모는 1만 2,700명에 달하였다. 영남의 분방병(分防兵)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나, 여주목사 한필원(韓必遠)·이천부사 조명욱(曹明勖)·양근군수 한회일(韓會一)·지평현감 박환(朴煥)이 약간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에 들어오고, 파주목사 기종헌(奇宗獻)이 수백 명을 거느리고 들어와 구원하니 경군(京軍)인 어영청·총융청·훈련도감군을 합하여 1만 3,800명의 군사를 확보하게 되었다. 한편, 도원수와 부원수 및 여러 도(道)의 감사와 병사에게는 근왕의 군사를 모으도록 하고, 명에 고급사(告急使)를 보내 구원을 청하기도 하였다. 당시 성안에는 군인과 백관이 50일 정도 먹을 분량의 양식이 있을 뿐이어서9) 지원군만을 기다리는 형세였다. 남한산성에 꼼짝없이 갇힌 인조와 조정은 납서(蠟書)10)를 보내 제도(諸道)의 군사와 도원수·부원수의 구원을 명령하며 애타게 지원군만을 기대하고 있었다.11)

지원군의 항전은 여주지역과 관련 있는 남한산성 주변이 가장 왕성하였는데,12) 기록상 제일 먼저 보이는 근왕병은 충청감사 정세규와 충청병사 이의배가 이끄는 군사였다. 충청도 원병들은 헌릉(태종릉)으로 진격하여 청의 군사와 응전하다가13) 적병에게 밀리어 남한산성에서 남쪽으로 40리 떨어진 험천(險川)에 포진하였으나, 청장의 공격을 받아 병력의 태반을 잃고 정세규만이 간신히 빠져 나왔다.14) 한편 이의배는 죽산산성에 진을 치고 진격하지 않아 사간원의 탄핵을 받기도 했으며,15) 적의 기세에 눌려 단신으로 진영을 이탈하여 몸을 감추었다.

강원도의 근왕병은 강원감사 조정호(趙廷虎)의 인솔로 원주목사 이중길(李重吉), 원주영장 권정길(權井吉)과 함께 도내 병력 7천 명을 이끌고 양근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강원도 근왕병들은 권정길을 선봉장으로 해서 남한산성으로 진출하여 산성과 연락을 취하도록 하고 조정호 이하는 양근에서 후속부대의 합류를 기다렸다. 12월 26일 강원도 영장 권정길이 병사를 거느리고 남한산성 가까이에 있는 검단산(儉丹山)에 도착하여 횃불로 상응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적의 습격을 받고 패하여 전군이 전사했으며,16) 권정길을 비롯한 수십 명의 군사만 겨우 탈출하여 양근으로 퇴각하였다. 양근에 주둔하고 있던 조정호는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진군하려 했으나, 인조의 항복으로 무마되었다.

12월 19일에 근왕의 명을 받은 경상감사 심연(沈演)은 8천 명의 군사를 모아 경상좌병사 허완(許完)과 경상우병사 민영(閔栐)을 선봉으로 삼아 각각 병력 1천 명을 이끌고 12월 24일에 대구를 출발하여 충주·여주를 거쳐 남한산성 방면으로 진군하도록 하고,17) 자신은 6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뒤를 따랐다. 남한산성 40리 지점에 위치한 쌍령(雙嶺)에 이르러 진영을 구축하였으나, 다음해 정월 3일에 청군의 공략에 대패하고 말았다.

전라도 근왕병은 전라감사 이시방(李時昉)의 지휘로 6천 명의 군사를 모집하였는데, 특히 전라병사 김준룡(金俊龍)은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들어와 수원 광교산(光敎山)에 주둔하며 전투에 이기고 전진하였다.18) 한편 이시방은 양지에 집결하여 남한산성으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었는데, 김준룡의 수원 철수를 패전으로 잘못 알고 군대를 다시 공주로 돌렸다. 이에 김준룡은 본대와의 연락 두절로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한 채 형세를 관망하고 있어 남한산성의 구원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처럼 남한산성을 구원하려던 근왕병이 연패하게 된 이유는, 조선측 부대들의 전투태세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이기도 했지만, 이때 청군은 먼저 여주·이천 등지에 주둔하여 남한산성으로 통하는 길을 차단하여 근왕병들의 진군을 적절하게 방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과 근왕병들의 활동 등을 종합해볼 때 여주지역은 삼남 및 강원도에서 남한산성을 향하여 올라오는 근왕병들의 길목이면서, 또한 청군의 방어망이 설치되어 있어 중요한 접전지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병자호란 당시 이 지역의 피해는 다른 어떠한 지역보다도 폐해가 컸다.

각 도의 근왕병의 구원이 연이어 실패로 돌아가면서 형세가 점점 불리해진 남한산성 내의 조선 정부에서는 주화론이 우세해지면서, 청과의 화의를 맺기로 결정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전쟁의 패배를 인조가 스스로 나와서 인정해야 한다는 청 태종의 항복의식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드디어 1637년(인조 15) 1월 30일에 지금의 서울 송파 삼전동에 나아가 전쟁의 패배와 양국 간의 군신관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19) 이후 전쟁의 수습은 군신관계로의 전환과 그에 따른 세폐의 증액, 세자·빈궁·봉림대군(鳳林大君 : 효종) 등의 인질, 삼학사(홍익한·오달제·윤집)의 체포 압송 등으로 일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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