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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계축옥사와 기천서원의 배향 인물

임진왜란의 수습과 더불어 광해군이 정권을 잡은 후 여주와 관련하여 가장 큰 정치적 사건으로 계축옥사(癸丑獄事)를 빼놓을 수 없다. 광해군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1613년(광해군 5), 계축년에 일어난 이 역모사건은 광해군의 정권을 공고히 할 수 있었던 정치적 계기였지만, 반면에 이로 인하여 광해군 집권내내 큰 걸림돌이 되었으며 마침내 그 정권의 몰락을 가져온 빌미가 되기도 했다.

이즈음 정치적·사회적으로 서자들에 대한 냉대는 극심해지고 출사의 길마저 막혀버린 서얼차대의 모순에 울분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이러한 신분제의 모순에 크게 낙담한 당대 명문가의 서자 7명은 스스로를 ‘죽림 7현(竹林七賢)’ 또는 ‘강변칠우(江邊七友)’라 부르며, 여주 남한강가에 토굴을 파고 거처를 마련하여 ‘무륜당(無倫堂)’이라 이름하고, 시도 짓고 술도 마시며 교유하며 지내고 있었다.

1613년 봄, 서인의 영수 박순(朴淳)의 서자 박응서(朴應犀)를 위시하여 심우영(池友英)·서양갑(徐羊甲)·허홍인(許弘仁)·박치의(朴治毅)·이경준(李耕俊)·김경손(金慶孫) 등의 강변칠우라는 서자들이 조령에서 한 은상(銀商)을 죽이고 돈을 강탈했다가 은상의 하인에게 뒤를 밟혀 모두 잡히는 일이 일어났다. 흔히 이 사건에 연루된 7명의 서자를 가리켜 ‘칠서지옥(七庶之獄)’이라고도 하는데, 이 일을 가지고 광해군의 신임을 받고 있던 이이첨(李爾瞻)이 모략을 꾸몄는데, 즉 박응서를 꾀어 역모로 만들었다. 국문 도중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박응서는 반역을 꾀하려고 군자금을 모으느라 강도 짓을 했으며 배후에는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이자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있다고 자백했다.1)

7명의 서얼들을 중심으로 거사 자금을 확보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이 역모 계획은 엄청난 파란을 몰고 왔다. 역모의 배후자로 지목된 김제남과 그의 세 아들 등 일가가 화를 당한 것은 물론이고, 집권층 북인(대북파)의 반대 세력이었던 서인과 소북파들이 대거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되었다. 결국 영창대군까지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증살(蒸殺)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선조의 계비이자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의 폐모론이 대두되었고 마침내 인목대비는 폐서인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정계는 광해군를 지지하며 영창대군의 제거와 폐모론을 추진한 이이첨·정인홍(鄭仁弘) 등의 집권북인층인 대북파에 의하여 장악되었다. 이것을 일러 ‘계축옥사’, ‘계축화옥(癸丑禍獄)’이라 한다. 결국 계축옥사로 인한 영창대군의 증살과 인목대비의 폐모는 이후 인조반정의 빌미가 되었으며, 마침내 광해군 정권은 파국을 맞게 되었다.

후에 여주의 기천서원에 배향된 인물 중에 이원익(李元翼)·정엽(鄭燁)·이식(李植) 등은 계축옥사 당시 인목대비의 폐모론에 반대하여 여주지역으로 귀양 혹은 낙향하였다. 청백리로 잘 알려진 이원익은 1613년 정조와 윤익에 의하여 제기된 폐모론에2) 대하여 가장 처음 차자(箚子)를 올려 폐모론의 부당함을 표하여3) 급기야 홍천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으며,4) 후에 여주로 옮겨오게 되었다. 정엽 역시 폐모론이 제기되자 지방직인 양양부사로 나갔다가5) 1618년 폐모의 조처가 단행되자 관직을 버리고 여주로 낙향하여 지냈다. 또한 이식도 폐모의 조처가 단행되자 남한강변으로 낙향하여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이들은 모두 인조반정으로 광해군 정권이 몰락하고 인조가 즉위하자 요직에 발탁되어 다시 중앙정계에 진출하였고, 이후 현종·숙종 대에 기천서원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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