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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지역의 방어체제

조선시대의 교통·통신은 사회·경제상의 의미보다도 행정·군사상의 의미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교통·통신의 원활한 수행을 위하여 역을 두었다. 주요 도로에는 대략 30리의 거리를 두고 역을 설치하여 마필(馬匹)과 역정(驛丁)을 갖추어 공문(公文)을 전체(傳遞)하는 이외에 공무(公務)로 왕래하는 자에게 마역리(馬驛吏)·역졸(驛卒)을 두어 역정의 관리와 공역을 담당하게 하고, 수개 내지 수십 개의 역을 한 도로 하여 찰방(察訪;종 6품), 또는 역승(驛丞;종 9품)으로 이를 관장하게 하며, 교통상의 지위를 이용하여 정보를 수집·보고하게 하였다.

역(驛)에는 대로(大路)·중로(中路)·소로(小路)의 셋으로 구분되었다. 경기도에는 대로 12역, 중로 9역 소로 32역이 있었으며, 여주의 소재지에 있었던 것은 소로로서 양화(楊花)·신진(新津)·안평(安平) 등 3개이다. 여주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중로(中路)·좌로(左路)·우로(右路)의 3가지 진격로1) 중에 중로에 위치하는 길목으로 다른 고을과는 견줄 수 없이 중요하다고 비변사는 인식하고 있었다.2)

왜란 중에는 성영(成泳)이 여주(驪州)에 이르러 원호(元豪)의 구병(舊兵)과 새로 모집한 인원을 합쳐 군대를 만들었고, 여주와 이천에만 적의 둔영이 없어 목사(牧使) 남언경(南彦經)·방어사 변응성(邊應星)과 함께 군사를 주둔시켰다.3)

조정에서는 왜적의 방어책으로 한강변의 수비강화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선조는 왜적을 방어하는 여러 방도를 정원에 전교하며 “한강(漢江)을 사수(死守)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고,4) 유성룡도 “강탄(江灘)은 가장 방수(防守)해야 할 곳입니다. 임진년에도 큰 강이 가로막혀 있으므로 쉽게 건너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5)

강변을 수비하는 방법으로는 여주(驪州)·양근(楊根)·광주(廣州)를 거쳐 도성에 이르는 백여 리의 강변에 파수하는 군사들로 하여금 높은 언덕의 지형으로 서로 호응할 만한 곳을 선택하여 목책(木柵)이나 토성을 쌓아 방어도 하고 변란을 알리는 곳으로 이용하도록 하였고, 좌방어사(左防禦使) 변응성(邊應星)의 좌영(左營) 군사 3,000여 명과 후영(後營)의 군사 2,000여 명을 분군(分軍)하여 각 여울을 파수(把守)하게 하였다.6)

또한 파사성(婆娑城)과 용진(龍津) 사이에 있는 부용성(芙蓉城)에 흙으로 망대(望臺)를 만들고, 양근군(楊根郡)에 있는 사궁성(舍弓城)은 기존의 여울을 막아 여주(驪州)와 충주(忠州)에서 오는 적을 막으려 하였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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