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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산성의 수축

파사산성(婆娑山城)은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천서리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1)이다. 신라의 파사왕(婆娑王, 80~112)2) 때에 축성하여 파사성(婆娑城)이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고, 파사산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파사산성에 관한 문헌적인 기록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1595년(선조 28)3)에 처음 보이고 있으며,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파사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파사산성은 해발 230.5m의 파사산에 위치하고 있고, 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축성한 산성으로 둘레는 약 1,800m, 높이 6.25m(낮은 곳은 1.4m)로 성벽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성벽을 살펴보면 초창기의 성벽과 그 뒤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한 때의 성벽을 구별할 수 있다. 유적으로는 천서리를 면한 곳에 동문지(東門址)가 있고, 양평군 개군면 상자포리를 면한 곳에 남문지(南門址)가 남아 있다. 동문지에는 옹성문지(甕城門址)가 있고, 남문지에는 문루(門樓)를 세웠던 고주형초석(高柱形礎石) 2개와 평주초석(平柱礎石) 등이 남아 있다.

파사산성은 주변에 다른 산봉우리가 없어 사방이 다 보이고, 성곽의 일부가 한강 연안까지 돌출되어 있어 한강의 상·하류를 한눈에 감시할 수 있는 요충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왜란 중에 조정에서는 파사산성 수축에 대한 논의가 많이 진행되었고, 왜적을 방어하기에 좋은 곳이라 생각하였다.

조정에서도 경기도의 좌·우·중(左右中) 삼로(三路)에 있는 산성을 수축하고 경영해서 서울 방어에 계획을 세우는 것이 급무(急務)라고 판단하고 있었고,4) 선조도 왜적을 방어하는 여러 방도를 전교하면서 “한강(漢江)을 사수(死守)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강을 지키지 않았다가 적이 성 아래까지 이르러, 적에게 포위당한 뒤에야 도성을 지키려고 한다면 그 계책은 잘못된 것이다.”5)라고 하였다.

유성룡은 “경기의 수영(水營)이 남양(南陽)에 있어서 서울과의 거리가 상당히 멀므로 위급한 일이 닥치면 제때에 전진하기가 어려울 듯하니, 수사(水使)로 하여금 바람과 파도가 높아지기 전에 강화(江華)·덕포(德浦) 등지로 가서 교동(喬洞)과 강화의 수로군(水路軍)을 모두 주사(舟師)에 소속시켜 농한기(農閑期)에 수전(水戰)을 연습시켰다가 유사시에는 그들을 거느리고 책응하게 하며, 수영에 소속된 여주(驪州)·지평(砥平) 등 먼 고을의 수군(水軍)은 제번(除番)시켜 파사성(婆娑城)에 소속되게 하여 상류(上流) 쪽을 방비하게 하는 것이 피차에 편리할 것이다.”6)라고 하였다. 비변사에서도 “파사산성(婆娑山城)은 상류의 요충지로 용진(龍津)과 더불어 서로 의지가 되는 형세이니 기보(畿輔)의 보장(保障)이 될 만합니다.”7)라고 하면서 파사산성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파사산성의 보수를 승려인 도총섭 의엄에게 지시하여 수리하게 하였다. 의엄은 성을 수축하고 안에 집을 짓고 둔전을 개척하였다.8) 이에 조정에서는 성안으로 들어가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부역을 면제하여 다수가 모이도록 했으며,9) 이들에게 군량·기계·군정(軍丁) 등을 준비하여 지급하게 하였다.10) 유성룡은 화살 300여 부(部)와 전죽(箭竹) 1만여 개를 보내주었고, 경기감사(京畿監司)도 전죽 2만여 개를 보냈으며, 여주(驪州)·이천(利川)·양주(楊州)·광주(廣州)의 전세(田稅)로 군량을 삼게 하여 200여 석을 확보할 수 있었다.11) 또한 황해도에서 대포와 소통(小筒)을 보내주어 어느 정도의 화기도 갖추게 되었고, 군량도 3,000여 석으로 늘어나게 되었다.12) 비변사에서는 의엄이 혼자 성을 지키기 어렵고 군사를 모집하거나 군량을 운반하는 일 등을 주관하게 하기 위하여 무장인 김수남(金壽男)을 수성장(守城將)으로 결정하여 함께 협력해서 파수(把守)하게 할 것을 경기도체찰사와 의논하여 결정13)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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