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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제도의 운영 및 변화

조선초기의 군사제도는 오위(五衛)·금군(禁軍)으로 대표되는 중앙군과 익군체제(翼軍體制)·진관체제(鎭管體制)로 대표되는 지방군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중앙군은 고려의 제도를 대부분 받아들여 십위체제(十衛體制)를 유지하다가, 두 차례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사병을 혁파하고 군사제도를 정비하여 1457년(세조 3)에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지휘하의 오위제도(五衛制度)1)로 정착되었다. 오위는 의홍위(義興衛)-중위, 용양위(龍驤衛)-좌위, 호분위(虎賁衛)-우위, 충좌위(忠佐衛)-전위, 충무위(忠武衛)-후위로 구성되어 있고, 각 위마다 5부(部)로 편성되고, 부마다 서울의 5부와 각 도의 진관군사가 소속2)되었다. 오위는 졸(卒)-오(伍)-대(隊)-여(旅)의 조직으로, 1오는 5졸, 1대는 5오, 1여는 5대로 하는 5진법에 의하여 편성되었다.

또 다른 중앙군의 하나인 금군은 국왕을 직접 호위하는 군대로 오위에 속하지 않았고, 내금위(內禁衛)·겸사복(兼司僕)·우림위(羽林衛)3) 등으로 인원수는 적었으나 왕권강화와 직결되어 필요에 의해 설치되고 법제화되었다.

지방군은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곳에서 대체로 육수군(陸守軍)과 기선군(騎船軍)의 두 가지 형태가 있었다. 육수군은 다시 번상(番上)하여 시위하는 시위패(侍衛牌)와 지방의 여러 영(營)이나 진(鎭)에 부방하는 영진군(營鎭軍)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영진군은 각 도의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와 그 밑의 절제사(節制使)·첨절제사(僉節制使)가 지휘했다.

평안도와 함경도에서는 고려말 이후 이어온 익군체제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익군은 공민왕 때 서북면(西北面)의 국경이나 군사적 요지에 만호부(萬戶府)를 두고, 그 밑에 몇 개의 익(翼)을 둠으로써 제도화되었고, 일정한 지역에 몇 개의 군익을 두고 이것을 합쳐 하나의 군사단위로 삼은 것으로 1378년(우왕 4)에 전국화되었다. 조직은 10인을 통할하는 통주(統主), 100인을 통할하는 백호(百戶), 1,000인을 통할하는 천호(千戶)가 획일적인 지휘계통을 유지하였고, 몇 개의 천호부를 합쳐서 만호부에 소속시켰다.

다른 지방군의 하나인 잡색군(雜色軍)은 영·진이 주로 해안지대를 중심으로 설치되어 내륙지방에 방어할 군사가 없어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향리·관노·무역백성(無役百姓)·공사천(公私賤) 등을 망라하여 편성한 것이다. 잡색군은 마병(馬兵)과 보병(步兵)으로 나누어 25인을 1대(隊)로 편성하여 수령이 지휘하도록 하였으나, 평상시 군사훈련에도 참가하지 않아 유사시에 대비하여 전국적 군사조직체계를 갖추었다는 데 의의가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군사조직은 1455년(세조 1)에 진관체제로 정비되었다. 먼저 전국적으로 내륙지방에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주위의 여러 읍을 좌·우·중의 3익으로 분속시켜 군익도를 편성하는 한편 군익도체제가 불편한 곳에는 별도로 독진(獨鎭)을 두어 이원체제로 운영하게 했다. 1458년(세조 4)에는 행정구역상의 도(道)와 혼동하기 쉽던 군익도의 조직을 주진(主鎭)·거진(巨鎭)·진(鎭)으로 재편하여 각 진의 독자성을 살리면서 군사기지로서의 성격을 뚜렷이 하였다. 진관체제는 병마절도사나 수군절도사의 주진 아래 첨절제사(僉節制使)가 여러 진을 통할하는 몇 개의 거진을 두고, 여러 진의 절제도위(節制都尉)·만호(萬戶) 등이 진을 중심으로 스스로 적을 방어하는 책임을 지는 자전자수(自戰自守)의 체제를 가지게 되었다. 1464년에는 번상군(番上軍)·영진군·익군 등으로 통일되지 않았던 명칭을 정병(正兵)으로 통일하여 균일한 국방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경국대전』에 나타난 진관 편성을 살펴보면 경기도는 한성(漢城)이 주진이고, 광주(廣州)·수원(水原)·양주(楊洲)·장단(長湍)·월곶(月串) 등이 거진이며, 여주는 제진(諸鎭) 중의 하나에 속해 있다.

16세기에 이르러 진관체제는 진관에 속한 정병이 군역과 요역을 함께 지면서 각종 폐단이 발생하자 포를 내고 군역을 지지 않는 방군수포(放軍收布)로 변질되고, 왜구나 북방 야인들의 침입을 각 진관의 소수 병력으로 자전자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조정에서는 전쟁이 일어나면 도내의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합심방어하는 제승방략체제(制勝方略體制)를 강구하게 되었다. 제승방략체제는 많은 군사력을 동원하여 적을 막는 총력방어태세로서의 이점이 있으나, 후방지역은 군사가 없어 방어선이 무너지면 적을 막을 방도가 없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왜란 때 이일의 상주싸움, 신립의 충주싸움에서 패전한 뒤 후방군이 없어 왜군이 서울로 쉽게 진격할 수 있었다.

조선후기의 군사제도는 중앙의 오군영(五軍營)과 금군, 지방의 속오군(束伍軍) 체제로 특징지을 수 있다. 오군영은 조선후기에 수도 및 외곽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훈련도감(訓鍊都監)·어영청(御營廳)·금위영(禁衛營)·총융청(摠戎廳)·수어청(守禦廳) 등이다.

훈련도감은 1598년(선조 26) 10월 서울 수복 후 포수(砲手)·살수(殺手)·사수(射手)의 삼수병(三手兵)을 중심으로 기민(飢民)구제와 정병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임시군영이었으나, 왜란 후에는 오위를 대신하여 후기 중앙군의 핵심군대로 자리잡았다. 훈련과 조직은 명나라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속오법(束伍法)에 따라 개혁하여 과거의 대부대 단위 전투형태에서 초단위(哨單位)의 소부대단위 전투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속오법은 부(部)-사(司)-초(哨)-기(旗)-대(隊)-오(伍)로 연결되는 편제로, 대개 120~125인의 병력이 군사조직의 기본단위인 1초를 이루었다.

어영청은 번상하는 향군으로 편제된 중앙군으로 인조반정 뒤 후금에 대한 대비책으로 설치가 논의되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을 계기로 중앙군으로 정착되었고, 1652년(효종 3) 어영청으로 개편되었다. 금위영은 1682년(숙종 8) 병조에 직속되어 있었던 정초청(精抄廳)의 정초군과 훈련도감에 속하여 있던 훈련별대(訓鍊別隊)를 합쳐, 6도 향군을 근간으로 조직·편제되었다. 총융청은 1624년 이괄의 난 이후 경기도 일대의 방어가 중요하게 되어 경기도 내의 정군·속오군(束伍軍)·별마대군(別馬隊軍)으로 조직·편제되었고, 군사는 2만여 명에 달하였다. 수어청은 1626년에 남한산성을 개축하고, 이를 중심으로 경기도 남방을 방어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친위군은 호위청(扈衛廳)과 용호영(龍虎營)으로 정비되었다. 호위청은 1623년 인조반정을 주도한 김류(金瑬)·이귀(李貴) 등이 반정에 사용한 사모군(私募軍)을 거의 그대로 궁궐숙위에 충당함으로써 설치되었다. 용호영은 조선전기의 금군을 모아놓은 금군청(禁軍廳)을 1755년(영조 31)에 개칭한 것이다.

조선후기 지방군사제도의 두드러진 변화는 속오군 조직의 등장과 영장제도의 설치였다. 속오군은 훈련도감과 같이 왜란시 임시로 설치된, 양반에서 공·사천에 이르는 총동원체제로 서 지방의 핵심군으로 국난을 타개하였다. 이러한 속오군은 병자호란 후 양(良)·천(賤)으로 편제되어 본역 외에 속오역을 지는 일신양역(一身兩役)의 폐해가 발생하였고, 1729년(영조 5)을 전후하여 천례화(賤隷化)되었으며, 말기에는 수포(收布)·수세군(收稅軍)으로 존재하여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영장제도(營將制度)는 문신수령이 가지고 있던 군사권을 무신이 담당하도록 한 것으로 1627년(인조 5)에 후금에 대비해 속오군을 강화할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그러나 수령의 반발·재정부족·유능한 무장 결핍 등의 이유로 병자호란을 계기로 문신수령 중심의 훈련체제로 바뀌었다. 이밖에도 해안과 내륙지방의 요지에 방어영(防禦營)4)을 설치하여 방어사가 집중적으로 지키게 하였다. 또한 산성의 중요성이 높아져 별장을 배치했으며, 해안·강안의 요해처에 도(渡)·진(津)을 설치하여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여주는 유성룡의 『진관관병편오책잔권(鎭管官兵編伍冊殘卷)』의 「편오사목」에 보면 경기도 좌영인 용진(龍津)의 좌사에 속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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