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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전반 김안국의 향촌활동

15세기 중엽 세조의 정난(靖難)에 이어 여러 차례 발생한 사화(士禍)와 반정(反正)은 16세기의 변화된 사회상이 중앙 정치에 반영된 것으로 이해된다. 기묘사화(己卯士禍)는 남곤(南袞)·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조광조(趙光祖) 등의 신진사류(新進士類)가 축출된 사건이다. 김안국은 전라도관찰사로 재임 중 1519년(중종 14) 11월에 일어난 기묘사화로 피화(被禍)되어 그 해 12월 16일 파직당한 후, 잘 알려져 있듯이 이천의 주촌(注村)과 여주 이포(梨浦)에서 18년간 퇴거하였다. 그의 삶 전체에 있어서 40대 초반부터 50대 말에 이르는 18년간의 시기로 사회적으로 왕성하게 활동할 시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사림파 중에서도 누구보다도 성리학적 사유에 입각하여 실질적인 향촌 교화에 깊은 관심을 가진 열렬한 인물이었다.

김안국의 향촌 퇴거는 1520년에서 1527년까지 8년간 이천 주촌(注村=注叱洞1), 현 부발읍 죽당 1리 줏골)에서, 1528~1537년까지 10년간 여주 이호촌(梨湖村, 현 금사면 이포리)에서의 생활로 나눌 수 있다. 그의 문집인 『모재집(慕齋集)』의 상당 부분2)은 당시 그의 주 생활권인 경기 동남부 이천·여주에서의 향촌 생활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 그의 여주에서의 생활은 어떠하였을까? 이천 줏골로 퇴거해서 “모옥(茅屋) 동쪽에 은일정(恩逸亭, 퇴거 3년째 지음)과 동고정(東皐亭, 4년째 지음)을 짓고 매일 여러 제생(諸生)들과 경의(經義)를 강론하자 학자들이 날로 모여들었다. 그래서 비록 소식(蔬食)과 채갱(菜羹)이라도 반드시 먹였다. 이에 시론(時論)하는 자가 학도들을 해산하라고 권고하자 웃으며 답변은 하지 않고 강의(講義)를 그치지 않았다”3)고 그의 행장(行狀)은 적고 있다.

이어 퇴거 9년째인 1528년(중종 22) 봄에 여주 천령(川寧) 이호촌에 우사(寓舍) 및 범사정(泛槎亭, 퇴거 10년째 지음)·장호정(藏壺亭, 은거 16년 째 지음)을 새로 마련하여 이거(移居)함으로써 여주지역에서의 활동을 본격화하였다.

근자에 모재 선생이 여주로 퇴거해서 친히 감농(監農)하는데 쌀 한 톨(一粒穀)도 버리지 못하게 하고는 “천물(天物)은 다 쓰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다.4)

이천에서 우거할 때 김안국은 동리 사람들이 먹을거리(부식류)를 부조하였으나, 여주에 퇴거해서는 그가 친히 감농(監農)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천에서보다 여주에 은거할 때 보다 경제적으로 안정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양반들의 교유(交遊)에 있어서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그들의 경제생활에서 큰 역할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를 ‘증답경제(贈答經濟)’라고 할 수 있는데 방문객의 선물과 손님이 돌아갈 때에 주는 답례품은 양반들의 일상적인 생활이었다.5) 『모재집』을 통해 볼 때, 퇴거기 김안국의 경우에도 ‘증답경제’가 일정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여주 퇴거시에 받은 물품은 크게 쌀·메밀 등의 주식(主食), 김치·참깨·노루고기 등의 부식, 누룩·술 등의 기호용, 산나물 등의 제수용품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물품을 보낸 대부분의 경우는 역시 김안국의 퇴거지역인 이천·여주의 진사·생원 등 지역의 사류들로 파악된다. 그리고 이천·여주·양지·광주 등 인근 지역의 수령(守令)의 경우도 빈도수에 있어서는 비교적 많은 편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러한 수증물품과 사류들간의 교류는 그의 퇴거기의 일상생활에서 큰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 주자료인 모재집과 기타의 자료를 통하여 모재 김안국의 여주 퇴거기의 활동 반경을 살펴보자. 향촌에서의 사류의 교류는 교류방식에 있어서는 우선 직접 교류와 간접 교류로 나눌수 있다. 직접적인 교류에는 가족·친지의 방문, 사류간의 교유(예:시회(詩會)와 향교·사마소 행사의 참석 등의 향당(鄕黨) 모임), 재지수령과의 교유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간접적인 교류에는 시문(詩文)의 교류, 묘도문자(墓道文字)의 수증, 서찰(書札)의 교환 등이 포함된다. 김안국을 중심으로 한 재지(在地) 사류간의 일상적인 교유는 대부분 주석(酒席)에서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이는 물론 모재집의 문장 대부분이 시문(詩文)이라는 자료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모재집을 통해 볼 때 지역 사류와의 교유는 모임의 성격상 시회(詩會)가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세찬(歲饌)·전춘(餞春)·답청(踏靑=淸明)·칠석(七夕)·중양절(重陽節) 등과 같은 절기에 모임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재지 사류의 수연(壽宴)이나, 사마 제군(司馬 諸君)과의 자리도 종종 마련되었다. 그리고 여주 이호 우거 시기에는 서너 차례 여강에서 뱃놀이를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김안국은 이미 퇴거하기 이전부터 사림들의 중망(衆望)을 얻고 있었으므로, 이 시기 교류의 한 양상으로 보이는 것은 그에게 명정(名亭)이나 기문(記文)을 부탁하는 경우가 많았다. 소일정(所逸亭, 亭主 윤언경), 정일정(靜逸亭, 민추), 일관정(逸觀亭, 진사 최릉), 유일정(幽逸亭, 김맹화), 쾌일정(快逸亭, 권황), 인재(訒齋, 강윤덕), 영벽헌(映壁軒, 최숙손), 송석정(松石亭, 최명창), 초암(草菴, 장흥사僧 조우) 등이 그가 명정한 것이다.

이 시기 재지(在地) 사류간의 일상적인 교유 범위는 대개 군현 단위의 생활공간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자신이 거주하는 군현을 중심으로 인접한 서너 개의 군현이 통상적인 활동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가족·친지간의 방문을 살펴보자. 우선 그의 동생인 김정국과는 연 1회 정도 만난 것으로 생각된다. 기묘사화로 파직된 김안국·정국 형제는 각기 여주의 이호와 고양의 망동에 퇴거하였으므로 수 백리 떨어져 있어서, “매년 한두 번씩 와서 만나 손잡고 담화하다가 10여 일만에 돌아가니 항상 동거하지 못함이 한(恨)이었다.”6)

김안국의 여주 퇴거시기에 교유한 인물들은 사마소 등의 생원·진사, 인근의 이천·광주·양근 등의 수령과 교수관, 이전부터 친교가 있었던 김안정(金安鼎, 개성유수) 등 원지의 빈객이 자주 교류한 인물들이다. 그리고 여주 장흥사의 각희(覺熙), 신륵사의 경준(浻峻)이나 양주의 수종사, 광주의 봉은사 등의 승려들과 교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승려들도 빈번하게 시축(詩軸)에 글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에 의하면 그의 문인(門人)은 총 44명으로 파악되는데, 그 중 이천·여주 퇴거기에 함경도 길주의 박희령(朴希齡)이나 김해의 홍언평(洪彦平) 등은 학업을 위해 타지에서 김안국을 찾았던 인물이다.

퇴거기 그의 향촌 교화는 재관(在官) 시기와는 달리 퇴거자로서의 모습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는데, ‘향음(鄕飮)이나 향회(鄕會)에 참석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또한 향교나 역(驛)의 중수기나 누정기를 짓거나 가요(歌謠)를 지어 성리학의 흥학(興學)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여주 이호 퇴거기에는 수태지(水苔紙)라는 새로운 종이를 만들어 스스로 주위사람들에게 권유하였으며, 후일 재서용되었을 때에 이를 진상하여 각도에 보급할 것을 청하기도 하였다. 일상생활에서의 실천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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