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의 비상 여주시 여주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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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여주지역과 사류의 활동

여주는 남한강 수로를 통한 교통의 편리성과 서울과의 근교성, 그리고 뛰어난 절경으로 인하여 조선시대 많은 사대부들이 이 지역의 경관을 시로 표현한 것이 많다. 뿐만 아니라 은거나 퇴거기를 여주에서 보내면서 향촌에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 지역이기도 하다. 즉 먼저 당시의 교통체계에서 볼 때 남한강 수로를 이용한 교통의 편리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 지역은 육로를 이용할 경우 한양과 이틀 정도면 오갈 수 있는 2일정(日程)1)에 해당하며, 남한강 수로로는 하룻만에도 오갈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당시 조사(朝士)·은거 사류(士類)들의 별서(別墅=鄕第)가 남한강 유역에 폭넓게 분포하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비록 정치적으로 실세(失勢)하여 퇴거한 사류라고 하더라도, 그들간의 다양한 교유(交遊)를 통하여 중앙 정계의 동향을 접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 시기 은거·퇴거한 사류들의 생활적인 미의식으로 볼 때, 대부분 풍광이 수려한 지점을 선호하여 자리잡았다는 점도 고려하여야 한다.

고려말 이인임에 의해 여흥의 금사리에 7년간 유배되어 육우당(六友堂)을 지은 척약재 김구용(金九容, 1338~1384)이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우왕이 강화로 유배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昌)을 즉위시켜 이성계(李成桂)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던 목은 이색(李穡, 1328~1396) 등은 여말 선초에 유배된 경우이다. 조선전기 사화(士禍)에 연루되어 은거나 퇴거하는 경우, 정자를 짓고 향촌의 삶을 영위하였다. 예를 들어 기묘사화 관련 피화인물 가운데 여주에 우거한 사류는 (표 14)와 같다. 이 가운데 신광한의 졸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영성부원군(靈城府院君) 신광한(申光漢)이 졸(卒)하였다. 광한의 자(字)는 한지(漢之)이며, 고령인(高靈人)으로 신숙주(申叔舟)의 손(孫)이다. (중략) 일찍이 조광조와는 사이가 좋았으며 조광조도 그를 아끼고 공경하였다. 조광조가 죽을 때 신광한도 연좌되어 폐기되었으며, 물러나 여주(驪州) 원형리(元亨里)에 우거하였다. 15년 동안 한가하게 생활하였는데 온 집안에 도서(圖書)를 쌓아 놓고 두문불출하였으며, 일찍이 구하려고 힘쓰는 일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시골에서 훌륭하게 생활하였다고 칭하였었다.
(『명종실록』권19, 명종 10년 11월 2일(계해))

조선후기에 경기지역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제자들이 학맥을 이루어 동서분당 이후 대개 서인계로 자리하였다. 그리고 인조반정 이후 서인계가 중앙정계를 장악하였던 관계로 서인계 핵심인물들이 경기지역에 대부분 그의 생활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한양과 자신의 근거지에 마련한 별서(別墅), 전장(田庄)을 오가며 생활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여주지역은 여흥 민씨, 안동 김씨, 덕수 이씨, 원주 원씨, 반남 박씨, 남양 홍씨 등 노론계 핵심가문의 유입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읍지류에 우거(寓居)로 표현되는 유배나 은거를 통하여 중앙 관인이 신학문(성리학/실학 등)의 지역 전파 및 향촌 교화 등은 해당 지역사회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본 절에서는 기묘사화로 피화(被禍)된 김안국의 사례를 통해 퇴거한 여주 지역에서의 지역사류와의 교유(交遊) 및 향촌 교화를 살펴보고자 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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