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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의 수취 부담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여흥부는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 되며, 간전(墾田)이 6,145결(結)이다.”고 하였고, 천령현은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 되며, 간전(墾田)이 4,573결이다. 논이 4분의 1이 넘는다.”1)고 하였다. 당시 10결 이상의 소유자는 모두 부유한 자요, 3·4결을 소유한 자도 오히려 적었으며, 일반적으로 소농민의 토지소유 결수가 1~2결에 불과한 것이 조선초기의 현실이었다.2) 조선전기 여주지역 농민의 토지소유 실태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소농민의 토지소유 결수가 다른 지역과 별반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전답(田畓) 비율은 천령현의 경우 논이 전체 간전 가운데 4분의 1 비율로 나타났다. 이는 조선전기 각 도 전답의 비율 중 수전의 비율이 가장 높다는 전라도가 10분의 4정도이고, 전국적인 평균이 28대 72인 것3)과 비교하여 보면 논의 비율이 전국적인 평균치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조선초기의 경기지역은 왕실의 사유지로서 내수사전(內需司田)이 광범위하게 분포하여 경영하였으며, 중앙으로 진출한 현직 관인은 물론 지방 거주의 품관(品官)·향리에 이르기까지 유세(有勢)한 자의 농장이 널리 존속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경기지역 내에는 현달한 관인(官人)의 농장(農莊=別業)이 많이 분포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록기사에 산견되는 풍천위(豊川尉) 임광재(任光載)의 여주농사(驪州農舍)4)나 권신(權臣) 한명회의 농장(農庄)5) 등은 그러한 사례에 해당한다. 특히 명종대에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한 김주(金澍, 1512~1563)의 경우 여주에서 산업을 경영하면서 비난을 받았다는 사신(史臣)의 평가는 사대부의 농장 경영에 의해 일반민들을 침학6)한 사례로 언급되고 있다.

여주지역에 사대부의 농장이 많은 이유는 사류(士類)의 심미안에 어울리는 여강(驪江)의 절경과 함께, 남한강 수로를 따라 수도 한성에 하루만에 도착할 수 있다는 교통상의 편리함과 함께, 앞에서 언급한 질 좋은 토질이 함께 작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농업생산력의 측면에서는 당시 여주지역의 한전(旱田)·수전(水田)에서 각각 휴한농법(休閑農法)이 극복된 상태이기는 하였지만, 지력을 유지하면서 세경(歲耕)하기 위해서는 시비(施肥)와 심경(深耕)이 전제되어야 했다. 이를 위한 생산수단으로 우마 등의 가축을 사육하는 일이 긴요하였다. 조선초기에 전국적으로 소의 사육 실태는 평균적으로 농가 10가호 중 1가구에 불과했으며, 그것도 대부분 한 마리를 소유하고 있었다. 경기지역의 경우도 소를 사육하여 영농하는 농가가 10에 한 둘도 없는 상태인데다가, 농민은 대부분 척박한 토지를 소유하였으므로 영농, 파종, 경운(耕耘) 등을 제 때에 하지 못하여 실농(失農)하기 일쑤였다. 이와 같이 여주지역의 농민들의 상황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조선시대에 농민들은 국가에 앞서 살핀 군역(軍役) 이외에도 전세(田稅)·요역(徭役)·공납(貢納)을 부담하고 있었다. 그 부담은 법제상의 규정과는 달리 현실에서는 사실상 경제외적 강제에 의해 농민층에게 가중되어 부과되는 실정이었다. 가령 전세의 경우 전국 토지의 대부분이 하등전으로 지정된 상태였으므로, 대체로 척박전을 소유하고 있는 대다수의 소농민들은 비옥한 토지를 소유한 자보다 상대적으로 무거운 담세의 부담을 안고 있었다. 연분(年分)과 토질의 답험손실(踏驗損失)의 경우에도 소농민은 상대적으로 손전(損田)에서도 실조(實租)를 수납(輸納)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인정(人丁)만을 대상으로 부과되는 군역의 경우에는 농민이 그 핵심 담당 계층이었다. 그런데 군역의 토대가 되는 군적의 작성이 서리에게 맡겨짐으로써, 불법적으로 뇌물을 바치는 자는 헐역(歇役)으로 이속되고 소농민이 그 고역을 대신하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세조대 시행된 보법(保法)을 통해 대폭 증가된 군액에 따른 부담이 소농민에게 더욱 가중되어 부과되었다. 이에 따라 16세기에 들어서는 군역의 고역을 피하기 위한 유망민이 속출하였다. 그러나 호수의 감소와 관계없이 고정된 군액은 구액을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군역을 담당한 자가 도망하게 되면, 그의 친척이나 이웃에게까지 부담이 전가되어 토지를 모두 방매하거나, 세가(勢家)에 투탁(投托)하는 사례가 늘어갔다. 더구나 군역의 대립제(代立制)에 따른 군역가의 포납화(布納化)가 보편화되면서 군역은 양인층만을 대상으로 하는 과중한 수탈 행위로 변해 갔다.

요역은 인정(人丁)을 기준으로 부과하던 것에서 세종대에 토지로 기준이 전환되고,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전(田) 8결당 1부(夫)를 차출하되, 1년의 사역 일수가 6일을 넘지 않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요역도 전세와 비슷한 양상으로 세력이 있는 자의 토지는 그 실수에 비해 적게 부적(簿籍)된 반면, 빈약자는 정반대여서 부역(赴役)이 불균등한 상태였다. 공역(公役)을 모두 담당해야 하는 공천(公賤)과 양민이 지탱하지 못하여 사천(私賤)의 용작인(傭作人)으로 전락하거나, 권문(權門)으로 귀속되는 형세였다. 더구나 경기지역은 왕도가 속한 지역이어서 요역의 번거로움은 다른 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7)

거울 만드는 일이 늦어진 일로 상의원(尙衣院) 관원을 국문하도록 명하였다. 왕이 용진(龍津) 강변에서 거울을 만들게 하였는데, 큰 것은 수레바퀴만 하였다. 여주(驪州)·양근(陽根)·지평(砥平)의 주민이 그 부역에 시달리어 거의 다 흩어져 도망하였다.
(『연산군일기』권58, 연산군 11년 7월 18(신축))

유리의 재료인 규사를 남한강변인 용진(龍津)에서 채취하여 거울을 제작하는 부역에 인근 지역의 주민들이 동원되었음을 위의 기사는 보여준다. 그런데 그 부역에 시달려 동원된 주민들이 거의 다 도망갔다는 것은 물론 과장된 표현이지만, 특정한 부역 노동의 부담이 얼마나 심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공납(貢納)의 경우는 각 군현의 전결(田結)의 다소에 따라 공물을 분정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책정된 공안의 물목(物目)과 액수를 당해 지역의 전결·호구·물산에 따라 각 군현에 부과하면, 그에 따라 각 군현의 관리가 다시 호구의 대소와 소경전의 다과를 참작하여 각 민호(民戶)에 부과하는 형태였다. 따라서 민호에 대한 공물 분정이 현지 관리의 임의에 크게 맡겨진 채 공납제가 운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상고(商賈)와 결탁한 수령의 임의 분정과 대납(代納)·방납(防納 ; 공물 바칠 것을 대신하여 바치고 그 대가를 여러 곱절 더하여 받는 일)의 현상이 공공연하게 자행되면서 무세(無勢)한 소농민에게 그 부담이 필연적으로 가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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