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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천서원과 고산서원터

조선중기부터 사학교육기관으로 서원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전국적으로 명종 대 이전에 생긴 서원은 29개, 선조 대에는 124개가 신설되었으며, 후기의 숙종대에 이르러서는 일개 도(道)에 80~90개의 서원이 생겨났다. 여주의 서원으로는 금사면 이포리에 있는 기천서원(沂川書院)과 대신면 보통리에 있던 고산서원(孤山書院)을 들 수 있다.

기천서원은 1579년(선조 12)에 여주목사 박승임(朴承任, 1517~1586)이 유림들과 논의하여, 이포에서 범사정(泛槎亭)을 짓고 우거하던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을 봉안하기 위해 주내(州內) 마생동(馬生洞)에 터를 잡고, 사우(祠宇)와 강당 6칸을 지어 마암서원(馬巖書院)이라 이름한데서 비롯되었다. 이는 임진왜란에 소실되어 복구하지 못하다가 1608년(선조 41)에 사림의 조청(疏請)에 의해 복원을 도모하여 이포의 현 위치로 이건(移建)하였다. 그 후 1611년(광해군 3)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과 치재(耻齋) 홍인우(洪仁祐, 1515~1554)를 함께 배향하였다. 1625년(인조 3)에는 유생 성여격(成汝格) 등이 상소하여 기천서원(沂川書院)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그 후 1661년(현종 2)에는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1547~1634), 수몽(守夢) 정엽(鄭曄, 1563~1625), 나재(懶齋) 홍명구(洪命耉, 1596~1637)를, 1708년(숙종 34)에는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을 추향(追享)하였다. 1802년(순조 2)에는 기천(沂川) 홍명하(洪命夏, 1607~1667)를 추가 배향하여 총 8인의 성현을 모셔오다가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1937년 김영진(金泳鎭) 등 여주지역의 유생 백여명이 기금을 모아 사우만을 중건하여 모현사(慕賢祠)라 하였다가, 1979년 서예가 김충현이 기금을 부담하여 퇴락한 건물을 새로 복원하고 기천서원이라는 현판을 다시 걸었다. 이어 1987년과 1994년의 복원을 통해서 나머지 부속 건물들도 중수되어 서원으로서의 옛 모습을 되찾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기천서원은 서원말 뒤쪽의 야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서원의 앞쪽에 동·서무가 위치하고, 위쪽에 사당이 자리잡아 전학후묘의 배치를 갖추었는데 강당은 없다. 서원 동쪽 언덕에는 모현사가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지붕이고, 내부는 여덟 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매년 2월 중정(中丁, 두 번째 丁日)과 8월 중정일에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다.

고산서원은 1686년(숙종 12)에 지방 유림에 의해, 석탄(石灘) 이존오(李存吾, 1341~1371)와 회곡(晦谷) 조한영(曺漢英, 1608~1670)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되었으며, 1708년(숙종 34)에 사액되었다가 1871년에 훼철되었다. 고산서원터는 대신면 보통마을의 서편 구릉에 위치한다. 이외에 효종의 능인 녕릉(寧陵)을 향하여 서향으로 자리한, 송시열의 영정을 모신 사우(祠宇)인 대로사(大老祠)가 있다. 영·녕릉(英·寧陵)에 참배하러 온 정조의 명에 의해 1785년(정조 9) 9월 5일에 건립되었다. ‘대로(大老)’는 덕망이 높은 노인이란 뜻으로, 북벌(北伐)을 주장한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존칭이다. 그를 독향(獨享)한 대로사는 같은 해에 사액(賜額)되었으며, 1873년(고종 10)에 강한사(江漢祠)로 개칭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제외되어 18세기 후반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아울러 대로사비는 우암 송시열의 세번째 회갑년(1787)을 기리기 위해 장대한 규모로 조성되었는데, 비문은 정조가 친히 짓고 썼다. 이는 송시열을 추종하는 노론(老論)의 신임의리론(辛壬義理論)과 북벌대의론을 높여 현창하는 정치적인 조치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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