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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영릉의 천장

여주지역은 고려후기 1257년(고종 44)에 황려현(黃驪縣)에서 영의현(永義縣)으로 개칭되었다가, 1305년(충렬왕 31)에 순경왕후(順敬王后, 元宗妃)의 내향(內鄕)이므로 여흥군(驪興郡)으로 승격되었다. 그 후 1388년(우왕 14)에 우왕을 폐위시키고 이곳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1389년(공양왕 1) 여흥군(驪興郡)으로 강등된 여주는 조선왕조가 개창된 후 1401년(태종 1)에 원경왕후(元敬王后, 太宗妃) 민씨의 내향이므로 다시 부(府)로 승격되었는데, 이때 음죽현의 북촌인 어서이촌(於西伊村 : 현 이천시 장호원읍 於石里 북부)을 병합하여 영역이 확장되었다.1) 1413년(태종 13)에는 계림(鷄林)과 평양(平壤) 등을 유수부(留守府)라 하고, 수원(水原)과 여흥 등의 부(府)를 단부(單府)라 해서 명칭이 서로 혼동되므로, 단부를 고쳐 도호부로 하여 구별하면서부터 여주지역의 읍호도 여흥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이 때 여흥도호부는 안성, 양지, 양성, 음죽, 죽산과 더불어 충청도로부터 경기좌우도를 합치면서 경기도에 예속되었다. 아울러 천령군은 천령현으로 격하되면서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예속되었다.

이후 여흥부는 1469년(예종 1) 8월에 광주 대모산(현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던 세종과 소헌왕후를 모신 영릉(英陵)을 현재의 위치인 능서면 왕대리로 천릉(遷陵)함에 따라 천령현을 병합하여 목(牧)으로 승격시키고, 읍호도 여주(驪州)로 개호(改號)되었다.

  • 명하여 천령현(川寧縣)을 여흥부(驪興府)에 합하여 목(牧)으로 승격하고, 목사(牧使)와 판관(判官)을 두게 하였다(『예종실록』권 7, 예종 원년 8월 8일(기미)).
  • 이조(吏曹)에서 아뢰기를, “여흥부(驪興府)는 이미 목(牧)으로 높였으니, 청컨대 여주(驪州)로 개호(改號)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예종실록』권 7, 예종 원년 8월 18일(기사)).

앞의 두 기사는 조선시대 여주목이 성립되는 과정을 간략하게 잘 보여준다. 이는 조선시대의 읍호가 상급조직의 역할을 수행하는 목(牧)에 대해서는 따로 주(州)자를 붙여 일반 군현과의 차별성을 부각하는 관례에 따른 것이었다. 나아가 영릉의 제향을 여주목사가 거행하게 하기 위해 기존의 종3품의 목사를, 정3품 당상관으로 차임(差任)하자는 논의2)는 결국 실현3)되었다. 그만큼 영릉의 천장은 여주지역 행정체계를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조선초기의 여주지역은 여흥부 서쪽에 천령현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당시 천령현은 현재의 흥천면(興川面)과 금사면(金沙面) 전역, 그리고 이천시 부발읍의 북부지역에 해당한다. 1469년(예종 1) 8월 18일 여주목으로 읍호가 변경되면서 천령현은 폐지되어 여주목으로 이속되었다. 그 후 1499년(성종 19)과 1512년(중종 7)에 각각 옛 천령현민들이 현의 복립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같이 15세기 후반 ‘여주목의 성립’은 행정구역 및 체계에 있어서 오늘날 여주지역의 골격을 형성한 중요한 지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이 부(府)에 선왕의 능(陵)이 있으므로 승격시켜 주(州)로 하고, 목사와 통판(通判)을 두고, 또 지역이 좁으므로 천령현을 합하여 넓히니, 인물의 번화함이 비로소 다른 고을의 번성함과 견줄 만하게 되었다”4)는 임원준의 표현은 목(牧)으로의 승격을 잘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영릉의 천릉은 예종이 즉위하면서 대모산의 능지(陵地)가 불길하다고 논란이 되어 10월경부터 호조판서 노사신(盧思愼, 1427~1498) 등을 각지에 파견하여 지금의 영릉 자리로 결정한 후 이듬해인 1469년 1월 13일 천릉도감(遷陵都監)을 설치하여 천릉을 본격화하였다. 천릉과 관련한 각종 사목(事目)을 마련한 후 부역군(赴役軍) 5,000명, 공장(工匠) 150명이 신산(新山)에서 20일간 작업하였는데, 쌀 1,323석과 소금 41석이 소요되었다. 또한 3월 6일에 상여를 메는 담부(擔夫)는 1,500명을 삼운(三運)으로 나누어 양여(兩輿)를 운구하여 천릉하였다. 천릉이 완료된 후 계속하여 보토(補土)작업을 하였으며, 4월에는 영릉 동구(洞口)에 물을 저장하기 위해 인부 500명이 10일간 저수지를 만들었다. 그 후 앞에서 제시한 바와 같은 그 해 8월에 여흥의 읍격(邑格) 및 읍호(邑號)가 변동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종의 명복을 비는 원찰(願刹)의 건립은 세조 대부터 논의되었는데, 신륵사의 거리가 가깝고 원찰로 적격이어서 신륵사를 중수하여 쓰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1472년(성종 3) “2월에 역사를 시작하여 겨우 10월에 끝마쳤다. 그전 것을 수리한 것이 몇 칸이고, 새로 지은 것이 몇 칸이니, 합쳐서 2백여 칸이 되었다.”5) 아울러 절의 명칭도 보은사(報恩寺)라는 액(額)을 내려 영릉의 원찰로 삼았다.

영릉의 여주 천장 이후에 1501년(연산군 7) 한 때 고을이 잔폐하다는 이유로 판관을 없애기도 하였다.6) 예를 들어 “여주(驪州)는 아주 잔폐(殘弊)해져서 헌관(獻官)이 왕래할 때에 지공(支供)할 것을 장만하기 어려우니, 헌관·감찰을 근년의 전례대로 차출하여 보내지 말고 목사(牧使)를 시켜 대행”7)하자는 의견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전기 여주지역의 잔폐는 영릉의 제향을 위한 헌관의 지공(支供) 부담이 주요한 원인이었다. 이는 양주지역에 조선왕실의 왕릉이 자리잡으면서, 정작 양주지역민은 능역(陵役)과 헌관의 지공 등으로 각종의 부역에 시달렸던 사실과 유사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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