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의 비상 여주시 여주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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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여주의 지역적 위상

남한강을 끼고 경기도의 동남쪽에 위치한 여주의 전근대 시기 지역적 위상은 어떠하였을까? 조선초기의 학자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은 「신륵사기(神勒寺記)」에서 “여주(驪州)는 국도의 상류 지역에 있다”1)고 썼다. 김수온이 가리킨 국도는 바로 오늘날 충북 청주시에서 서울시에 이르는 한강의 뱃길이다. 신작로나 철도가 뚫리기 전까지는 경상도나 충청도·강원도와 같은 곳에서 나는 갖가지 산물과 사람들이 한강의 뱃길을 타고 와서 서울 땅에 닿았으므로 그 뱃길을 ‘나라의 길[國道]’로 부른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하겠다.2) 이 국도의 상류지대는 조선시대 여주의 지역적 위상을 잘 드러낸 말이다. 아울러 “진실로 국가의 상유(上遊)를 눌렀고, 경기(京畿)의 깊숙한 구역”이라는 임원준(任元濬, 1423~1500)의 승목기(陞牧記)는 이 지역의 지역적 장소성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함께 『조선왕조실록』에서 “여주는 기전(畿甸)의 큰 고을”3)이라 하여 목(牧)으로서의 읍격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후기에 이르러,

  • 여주는 바로 왜적이 오는 길목
  • 상류(上流)의 보장(保障)에 관한 지역
  • 파사산성(婆娑山城)은 상류의 요충지로 용진(龍津)과 더불어 서로 의지가 되는 형세이니 기보(畿輔)의 보장(保障)이 될 만하다.

란 표현4)에서,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여주의 지역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표현은 양란(兩亂)을 경유하면서 수도 서울의 방어를 염두에 둔 것5)이기도 하다. 수도의 외곽을 방어할 군사적인 목적이 강화되면서 1627년(인조 5)에 강화가 유수부로, 1794년(정조 18) 1월에는 화성(華城) 건설로 인하여 수원부가 화성유수부로, 이듬해인 1795년(정조 19)에는 남한산성(南漢山城)을 담당하는 광주부(廣州府)도 유수부로 승격되었다. 이로써 18세기말에는 4도유수부(四都留守府)체제가 성립되고, 이에 따라 여주지역도 기보(畿輔)를 지키고 막을 지역[保障]이라는 인식이 확대되어 갔다고 하겠다. 육로보다 수로가 훨씬 중요한 교통과 군사의 의미를 지녔던 전근대 사회에서 남한강을 끼고 있는 여주지역의 중요성은 그만큼 강조될 필요가 있었다고 하겠다.

조선초기 여주지역은 여흥도호부와 천령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조선초기에 이르러 두 군현이 통합되면서부터 오늘날의 여주지역의 지역적 위상을 갖게 되었다. 아무래도 조선전기 여주지역의 가장 큰 행정구역 변동은 북성산 아래로 영릉(英陵)이 천장(遷葬)되면서 여주목으로 승격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로써 천령현을 통합함에 따라 조선초기의 여주지역은 단부(單府)에서 목(牧)으로 읍격이 승격된 이후 관내지역 이속 등 큰 변동 없이 남한강의 대부분을 점하는 지역으로 자리 잡아 오늘에 이르기까지 경기지역의 동부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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