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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이색과 신륵사 대장각의 건립

한편 성리학 수용기의 많은 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이곡의 불교에 대한 시각은 비판적이라기보다는 그것의 독자적인 특성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불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선을 행하도록 하기 때문에 불교가 영구히 성행하게 된다고 하면서 그것의 교화기능을 인정하고 있다.1) 이곡은 불교와 유교가 구별되는 종교이지만, 근본은 동질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2) 유교나 불교 모두 마음을 기르는 측면에서는 같으며, 그 방법에 있어서나 역할에 있어서만 차이가 날 뿐이라는 입장이다.3) 그의 이러한 불교관은 그 자신의 신불(信佛) 태도와 관련지어 보면 이해가 간다. 그는 부모를 위하여 불사를 일으키거나 승려가 사당을 지어 부모를 모시는 일 등을 효와 연결지어 합리화하였다. 이곡 자신도 부모의 명복을 위하여 대장경을 인출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그가 죽은 뒤에 아들인 이색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대장경을 판각하여 여주의 신륵사에 봉안하게 되었다.4) 이색 역시 “불(佛)은 대성인이라느니, 지성·지공하다느니” 하여 불교 자체의 종교적 기능에 대하여 우호적인 태도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이색이 공민왕대 보여준 불교의 사회적 폐단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은 우왕대에 들어오면서 크게 후퇴하였다. 그것은 그 자신이 처한 정치적 상황과도 관련이 있었다. 우왕대 들어서 정몽주, 이숭인, 김구용, 박상충 등 그의 동료나 문인들이 귀양을 갔다. 그리고 그 자신도 조민수(趙敏修)와 함께 창왕을 세우고 우왕을 맞이하려고 하였다는 죄목으로 오사충(吳思忠)과 조박(趙璞)의 탄핵을 받아 귀양길에 올랐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불교에 깊이 빠져들었고, 그에 따라 승려들과의 교류도 더욱 활발하였다. 더욱이 1376년(우왕 2) 나옹화상 혜근이 여주에서 입적하게 되자, 왕명에 의하여 그의 탑비명을 지어준 것을 계기로 나옹의 제자들과 활발한 교유를 가졌다. 특히 이색은 아버지의 유언을 이어 대장경을 인성할 때 나옹의 문도들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나옹의 문도들과 이색의 관계가 밀접했음을 다음의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왕명을 받고 지공과 나옹 두 화상의 부도에 명(銘)을 썼는데, 이로써 그들의 도제(徒弟)들이 많이 문하에 출입하게 되었으며, 詩文을 구하는 것이 있으면 문득 이에 응하니 이 때문에 한때 부처에게 아첨한다는 비방이 있었다. 그러나 공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그들이 임금이나 어버이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이라는 데야 내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이 기록은 이색의 행장인데, 여기서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과의 사이에 시문의 요구에 기꺼이 응할 정도로 긴밀한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을 계기로 사대부들로부터 부처에게 아첨한다는 비방까지 받을 정도였다. 그는 이러한 사대부들의 비판에 대해 충효의 논리로 합리화하고 있다. 부처에게 아첨한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계속된 이색의 신불(信佛) 태도로 뒷날 그는 정치적으로 큰 곤경에 처했다.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그가 추진한 대장경의 인성이었다. 대장경의 인성은 그의 나이 49세 때인 1380년(우왕 6) 2월에 착수하여 다음해인 7년 9월에 완성하였다. 그가 대장경을 인성하게 된 계기를 살펴보면, 그의 아버지 이곡이 1350년(충정왕 2)에 어머니가 돌아가자 승려 상총(尙聰)을 불러다가 불경을 읽고 명복을 빈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색은 상총으로부터 아버지와 어머니의 명복을 빌고자 하면서 어찌 한 부의 불경도 간행하지 않느냐는 충고를 받았다. 이에 이곡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대장경을 인성할 계획을 세웠으나, 정작 대장경 인성을 착수도 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 뒤에 이색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상총으로부터 죽은 아버지의 입원(立願) 내용을 전해들었다. 이에 대하여 이색은 개인적으로 고심은 하였지만 즉각 행동에 옮기지는 못했다. 당시 그는 불교의 사회적 폐단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불사를 일으키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1355년(공민왕 4)에 어머니가 죽고, 그 뒤 공민왕마저 죽자 그의 마음이 급격하게 불교로 기울게 되었다.5) 그러던 가운데 1379년(우왕 5)에 상총이 다시 찾아와 대장경 인성을 권유하였다.6) 이에 이색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어려운 불사라고 생각하여 나옹의 문도들에게 협조를 요청하였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왕명에 의해 나옹의 탑비명을 지어준 것이 계기가 되어 그들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색의 대장경 인성은 그들의 도움으로 비로소 착수할 수 있었다. 나옹의 문도들은 전국의 주요 지역에서 희사를 모아 그 간행 비용을 마련하였다.

마침내 1382년(우왕 8)에 영통사에서 새로 완성된 대장경의 교열을 끝내고, 배편으로 여주의 신륵사에 옮겨와 새로 지은 대장각에 안치하였다. 대장경을 여주의 신륵사로 옮겨온 것은 그것의 인성에 나옹의 문도들의 힘이 결정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특히 경제적으로 간행 비용을 마련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 긴밀한 관계에 놓인 나옹의 문도들의 근거지가 여주 신륵사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여주에는 그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던 사전(賜田)이 있었다.

대장경 인성에는 승려들뿐만 아니라 최영, 조민수, 염흥방, 권중화 등 권신을 비롯하여 80여 명의 신도들도 참여하였다. 이로 미루어보건대 이 대장경 인성은 세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불사였다고 할 수 있다. 나옹이 회암사를 중수하자 중앙과 지방에서 많은 부녀자들이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하는 사실과 비교된다.

이색의 대장경 인성과 나옹의 회암사 중창은 여러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 나옹이 회암사를 중창하기 위하여 전국의 유력한 사찰을 다니면서 그 비용을 조달하였다는 점은 대장경 인성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나옹의 문도들이 전국의 주요한 지역에 나누어 가서 희사를 모았다는 사실과 견주어진다. 또한 회암사 중창 때 많은 사람이 몰려들자 도당이 이를 금지시켰으나 막을 수가 없어 나옹을 영원사로 추방하게 되고 결국 신륵사에서 죽게 된다. 이색의 대장경 인성도 당시 사대부들의 많은 비판을 받았다. 특히 공양왕대 들어서 오사충(吳思忠)과 조박(趙璞) 등이 올린 척불상소(斥佛上疏)에서 집중적인 비판을 받았다.7) 이로 인하여 그는 정치적으로 더욱 어려운 처지에 이르게 되었고,8) 결국 금천(衿川)으로 귀양 갔다가 여주에서 죽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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