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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 불교계의 동향과 여주 신륵사

몽고와의 항쟁을 주도했던 최씨무인정권이 무너지고 강화가 성립된 후 고려사회는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불교계도 예외일 수 없었다. 무신정권이 성립된 뒤 고려의 불교계에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지눌로 대표되는 조계종의 확립이었다. 이들은 신앙결사운동을 통해 기존의 문벌귀족 가문과 결탁하였던 교종 중심의 불교계를 개혁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불교계의 혁신운동은 원(原) 간섭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쇠퇴하였다.

당시 불교계는 크게 두 가지 경향을 보였는데, 하나는 원 간섭기라는 현실 속에서 지배층과의 타협을 통하여 자신의 교단을 유지하려는 모습이다. 이로 말미암아 기존에 불교가 수행해오던 사회적 기능들이 쇠퇴하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신앙결사를 계승하면서 당시 불교계가 드러낸 보수적 경향을 비판하려는 움직임이다.

먼저 전자와 관련하여 주목해볼 것은 수선사(修禪社)의 계승을 표방하면서 부각된 가지산문(迦智山門)과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了世)가 결사한 백련사를 계승하면서 그 성격을 변질시킨 묘련사 계통, 그리고 사경(寫經)의 성행과 함께 그것을 담당할 승려를 원에 파견함으로써 지위를 확보한 법상종(法相宗) 계통을 지적할 수 있다.

최씨정권의 후원을 받으면서 번성하였던 수선사의 경우, 사굴산문 출신의 보조(普照)와 그의 후계자인 혜심(慧諶)의 법맥은 계속해서 이어져갔지만 많이 위축되었고, 반면에 가지산문은 수선사의 계승자를 표방하면서 조계선종을 대표하는 교단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가지산문의 대두는 일연의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수선사가 최씨정권의 붕괴로 세력이 약화되자 일연은 수선사의 별원(別院)인 선원사(嬋源社)에 주석하면서 그의 계승자임을 자처하고, 가지산을 중심으로 산문의 재건에 힘썼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왕실과 권력층의 후원을 받아 가지산문이 수선사의 지위를 대신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 뒤 가지산문은 보감국사(寶鑑國師) 혼구(混丘)가 나와 크게 활약하였고, 태고화상(太古和尙) 보우(普愚) 때 이르러서 절정에 이르렀다. 보우는 처음 양주의 회암사에서 머리를 깎고 수행에 정진하였다가 1276년(충숙왕 2)에 원에 들어가 원 황실의 후원을 받으면서 새로운 임제선풍을 공부하였다. 그는 임제종의 18세 법손인 석옥청공(石屋淸珙) 밑에서 수학하고 귀국한 뒤 공민왕의 요청으로 서울로 올라와 봉은사(奉恩寺)에서 개당(開堂)하였으며 왕사(王師)로도 책봉을 받았다. 그 뒤 신돈(辛旽)과 갈등을 보이며 어려움을 겪다가 신돈이 제거된 뒤에 국사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그는 당시 교단 내의 선(禪)·교(敎) 대립은 물론 선종 내에서도 9산문(山門) 간의 대립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원융부(圓融府)를 설치하는 등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교단의 개혁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까지도 관여하였다. 특히 신돈을 사승(邪僧)이라고 비판하면서 그에게 정사를 맡기지 말도록 탄핵하였고, 공민왕 5년에는 서울을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보우의 임제선(臨濟禪) 도입과 선양은 고려 말의 타락한 불교와 혼란한 정치를 개혁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태고화상 보우와 거의 같은 시기에 활약한 나옹화상(懶翁和尙) 혜근(慧勤) 역시 선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혜근도 보우처럼 1347년(충목왕 3) 원에 들어가 법원사(法源寺)에서 인도승으로 고려에도 다녀간 적이 있는 지공선사(指空禪師)를 만나고, 자선사(慈禪寺)에서 임제종(臨濟宗)의 거장인 18대 평산처림(平山處林)으로부터 불법을 전수받았다. 혜근의 도행은 원의 황실에까지 알려져 순제(順帝)가 제지(帝旨)를 내려 대도(大都)의 광제선사(廣濟禪寺)를 주지하도록 하였다. 나옹 혜근은 11년 만인 1358년(공민왕 7)에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였는데, 왕의 지우(知遇)를 얻어 궁궐에서 설법하였고, 선·교의 승려를 모아 보인 승과(僧科)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선·교 양교의 승과는 1370년(공민왕 19) 9월에 있었던 공부선(工夫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공부선의 주관자를 주맹(主盟)이라고 불렀는데, 혜근이 여기에 임명되었다.1) 보통 승과는 종파별로 또는 선·교로 나뉘어 실시되었는데, 이때의 공부선은 화엄종, 천태종, 조계종 등이 모두 관여하였다.2) 왕은 종실과 공신, 그리고 재추양부(宰樞兩府)의 문무백료(文武百僚)를 거느리고 몸소 참관하였다. 이 공부선은 결국 천희(千熙)로 대표되는 화엄종과 나옹(懶翁)으로 대표되는 조계종의 경쟁이라고 할 수 있다.3) 이때 열린 공부선의 최종 합격자는 조계종의 혼수(混修)였다. 이로 말미암아 당시 고려 불교계에서 조계종이 우위를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옹화상 혜근은 여주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4) 여주의 신륵사는 그가 조정의 명을 받고 밀양의 영원사(瑩源寺)로 가던 중에 입적한 곳이다.5) 그가 밀양의 영원사로 가게된 것은 당시 대간의 탄핵 때문이었다. 나옹은 스승이었던 지공(指空)이 양주의 회암사(會巖寺)가 자신이 수학하던 나란타사(那蘭陀寺)와 지형이 비슷하니 이곳을 확장하여 불교를 부흥시키도록 부탁을 받았다. 이에 나옹은 회암사에 지공의 부도를 건립하고 이 사찰을 크게 중창하였다.6) 회암사의 낙성식에 앞서 그곳에서 문수회(文殊會)가 개최되었는데, 이때 개경과 지방으로부터 신도들이 몰려들었다.7) 이들은 신분이 높고 낮고 간에 백포(帛布)와 과병(果餠)을 다투어 시주하였으므로 절의 문앞부터 크게 번잡하였다고 한다.8) 이로 말미암아 사헌부가 관리를 보내어 부녀(婦女)의 출입을 금지하고, 또 도당이 관문을 아예 닫아도 막지 못하였다. 결국 나옹은 경상도 밀성군의 영원사로 추방되었고, 그곳으로 가려고 한강을 거슬러올라가다 여주의 신륵사에서 5월 15일에 입적하게 되었다.

나옹이 어사대의 탄핵을 받던 시기는 공민왕의 시해와 함께 우왕(禑王) 집권 초기의 정치적 불안이 계속되던 때였다. 게다가 계속된 왜구의 침입으로 말미암은 국가재정의 황폐화는 극에 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회암사 확장을 위한 사람들의 시주행위는 성리학을 공부한 신진의 대간(臺諫)들에게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보우와 혜근은 다같이 원으로부터 임제종을 전수하였고, 이를 통하여 당시 불교계의 통합과 정화에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 역시 왕실 및 귀족층의 후원을 받으면서 보수적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타락상을 드러내고 있던 당시 불교계의 모순을 극복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수선사와 달리 백련사 계통이 드러낸 문제는 이보다 심각하였다. 충렬왕은 재위 9년부터 10년에 걸쳐 자신과 왕비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의 원찰인 묘련사(妙蓮寺)를 개경에 창건하였다. 왕은 여기에 자주 행차하여 원나라 황제의 축복과 종묘·사직의 평안을 빌기는 하였지만 개인의 기복을 위한 목적이 강하였다는 점에서 귀족불교의 성격을 띠었다. 묘련사에서 활약한 인물의 대부분은 백련사 출신의 승려들이었다. 백련사를 주법하고 있던 원혜는 묘련사가 창건되자 곧바로 주지로 임명되었고, 그 뒤를 이어 백련사에 머무르던 정오(丁午)가 상경하여 묘련사의 주지를 맡게 되었다. 이들은 왕실의 원찰인 묘련사에 초청된 이후에 당시 교권의 중심이었던 국청사(國淸寺)·영원사(瑩原寺) 등을 중심으로 왕실의 지원을 받으면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묘련사는 원 간섭기의 대표적인 권문세가였던 조인규의 넷째 아들 의선(義璇)에 의해 더욱 번창하였다. 그는 새롭게 전개된 대원관계(對元關係) 속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원 황실과 쌓은 유대를 바탕으로 그 역시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되었다. 의선은 원에 들어가 황제의 각별한 배려로 “삼장법사”라는 법호를 받고 대천원연성사(大天源延聖寺)와 대보은광교사(大報恩光敎寺)의 주지직을 맡기도 하였다. 의선은 승려이면서도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는 귀족과 같은 존재였다.9) 그는 자신의 가문 세력을 바탕으로 묘련사뿐만 아니라 만의사(萬義寺)·영원사(瑩原寺) 등의 주지직과 그 소속의 재산을 놓고 경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원 간섭기에 접어들면서 변질된 불교계의 보수적 경향을 비판하는 움직임도 존재하였다. 특히 무인정권기 신앙결사를 통해 백련사가 추구하던 사상적 경향을 계승한 운묵(雲默) 화상(和尙) 무기(無寄)를 들 수 있다. 그는 원찰이라는 명분으로 권문세족과 정치적·경제적으로 결탁하고 있던 당시 불교계의 모순과 보수적 경향을 비판하는 한편 백성들의 각성도 촉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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