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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몽고의 침략과 여주민의 항전

13세기에 들어와 동아시아 국제정세는 크게 변화하였다. 그 변화의 핵심은 몽고가 거란과 여진의 지배에서 벗어나 거대한 세력을 형성한 사실에 있다. 몽고족이 통합을 이루어 강대한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테무진[鐵木眞]의 역할 때문이었다. 당시 중국의 남부에는 남송(南宋)이 자리하고 있었고, 북부 및 만주일대에는 여진족의 금(金)이 지배하고 있었다. 몽고의 태조는 중국내륙뿐만 아니라 그 주변지역을 차례로 정복하였는데, 이러한 움직임에 고려도 예외가 아니었다.

고려와 몽고가 처음 접촉하게 된 것은 고려변경을 침입하였던 거란족에 대한 토벌 때문이었다. 거란은 금의 지배력이 이완된 틈을 타 금(金)과 충돌하다가 몽고군의 공격을 받아 고려 영토 내로 들어오게 되었다. 거란의 갑작스러운 입경에 놀란 고려는 김취려(金就礪) 등을 지휘관으로 3군을 편성하여 이를 방어케 하였다. 그러나 거란의 후속부대는 계속 남진하여 황해도와 개경 근처까지 침구하였고, 여주와 충주, 제천 등지까지 내려왔다. 고려군의 지휘관이었던 김취려는 거란군을 쫓아 여주의 법천사(法泉寺)에까지 이르렀는데, 이곳에서 배로 강을 건너다 침몰하기 직전의 위기에 처하였다. 이 때 원주촌에 거주하던 3명의 노(奴)가 가까스로 그들을 구출하였다고 한다. 원주촌(原州村)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아마 원주의 행정구역 안에 있는 하나의 촌락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1) 특히 법천사가 위치하였던 여주 근방의 어느 한 고을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당시 원주목의 관할 아래 있었던 황려현(黃驪縣)은 고려초기의 지명이며, 고종 때에 ‘영의(永義)’로 고쳤다가 충렬왕 31년에 순경왕후 김씨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여흥군(驪興郡)으로 승격되었다.2) 사료상에 법천사(法泉寺)를 ‘황려현 법천사(黃驪縣 法泉寺)’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당시 여주가 여주목(原州牧)의 관할하에 있던 시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취려의 군대가 도강하다 위기에 처한 곳이 황려현 법천사 부근이었고, 그들을 구한 3명의 노(奴)의 출신지(거주지)가 원주 행정구역 안의 어느 한 촌락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곳은 여주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우연히 길을 가다가 김취려를 구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마 그들은 김취려가 이끄는 부대나 아니면 그 지역의 방어를 위하여 동원되었던 노(奴)들이었다고 생각된다. 거란과의 전투에 동원된 것은 노(奴)뿐만이 아니었다. 국가의 위급 상황에 일반 백성들의 동원은 더 많았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미루어 볼 때 여주민도 여기에 어느 정도 참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거란의 침구를 막아낸 고려는 더욱 큰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것은 몽고의 침입이었다. 고려와 몽고는 강동성에 웅거한 거란을 함락시킨 후 형제의 맹약을 맺어 우호관계에 있었으나, 고려에 대한 몽고의 요구가 점차 지나치면서 이 둘의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몽고의 사신 저고여(箸古與)가 고려로부터의 귀국 도중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 일로 고종 18년에 제1차침입을 해오게 되었다. 이리하여 몽고는 전후 30년간 6차례의 침입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몽고의 침략으로 고려가 입은 피해에 대하여 여주출신의 이규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심하도다. 달단의 환란을 일으킴이여! 그 잔인하고 흉포한 성품은 이미 말로 다할 수 없고, 심지어 어리석고 어두움도 또한 금수보다 심하니, …… 이런 때문에 그들이 경유하는 곳에는 불상과 서책을 마구 불태워버렸습니다. 이에 부인사에 소장된 대장경 판본도 또한 남김 없이 태워버렸습니다. 아, 여러 해를 걸려서 이룬 공적이 하루아침에 재가 되어버렸으니, 나라의 큰 보배가 상실되었습니다.

이규보의 시처럼 몽고는 그들이 지나는 곳마다 곡식은 물론이고, 불상이나 서책, 건물 등을 모두 불태워 재로 만드는 잔인한 전술을 사용하였다. 이로 인하여 백성들은 많은 고통에 시달려야만 하였다.

여주지역은 몽고의 여러 차례에 걸친 침략을 받았다. 경상도 내륙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광주와 여주를 거쳐 충주로 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앞서 망이·망소이 반란군이 개경을 점령하겠다고 선언한 뒤 여주를 점령하였던 것도 이곳이 개경과 경상도 내륙을 잇는 중요한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1235년(고종 22) 당고(唐古)가 이끄는 몽고군은 철주(鐵州), 귀주(龜州), 안북부(安北府) 등 평안도지역과 등주(登州 : 安邊) 등 함경도 지역을 유린한 뒤 개경과 남경, 여주를 거쳐 충주를 공격하고, 남쪽으로 충청, 전라, 경상도까지 이르렀다. 당고(唐古)에 의한 3차침입은 그전과는 달리 강도(江都) 정부와 교섭을 벌이지 않고 무조건 전국토를 닥치는 대로 공격하였다. 이러한 몽고군의 침략에 고려의 군민은 힘을 합하여 대항하였다. 광주민의 항전과 처인성 전투, 충주성 전투, 다인철소민(多仁鐵所民)의 항쟁 등을 주요한 사례로 들 수 있다. 여주와 관련하여 주목해볼 것은 광주와 충주성 전투이다. 광주와 충주는 모두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여 있기 때문에 경상도로 남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광주와 충주를 공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주는 바로 그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전화를 피해갈 수 없었다. 먼저 광주민의 항전에 대하여 다음 기록을 참고해보자.

  1. ① 광주(廣州)는 신묘(辛卯)·병진년(丙辰年)에 오랑캐 군사들이 포위 공격하였으나 능히 굳게 지켜 함락되지 않았으니, 상요(常徭)와 잡역(雜役)을 면제하여 주도록 하라고 하였다(『고려사』 80, 식화지 3, 진휼 고종 22년 5월).
  2. ② 동(冬) 11월에 몽고의 대병(大兵)이 몰려와 수십 겹으로 포위하고 온갖 계책을 다해 공격하기를 수월(數月)에 이르렀다. 공은 밤낮으로 (성을) 수리하여 수비하고, 사기(事機)에 따라 응변(應變)하면서 자신의 전략을 내어 혹은 사로잡고 죽임이 심히 많으니 오랑캐가 불가능함을 알고 드디어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광주(廣州)는 남로(南路)의 요회처(要會處)에 해당하여 이 성이 함락된다면 나머지는 가히 알 만한 일이라. 그대가 아니었다면 거의 위태로울 뻔하였다(『고려묘지명집성』, 李世華墓誌銘).

위의 ①에 의하면 광주는 1231년(고종 18)과 1232년(고종 19)에 1차, 2차 침입을 받자 백성들이 일치 단결하여 잘 물리쳤기 때문에 정부에서 요역을 면제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②는 이세화묘지명으로 당시 광주에서의 승리는 광주부사 이세화(李世華)가 몽고의 대병(大兵)을 맞아 밤낮으로 성을 수리하며 지키고, 또 임기응변을 잘하였기 때문임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광주 승리의 중요성은 이곳이 남로로 통하는 요충지이기 때문에 만일 이곳이 함락되었다면 그 나머지 지역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광주의 항몽전에는 여주의 주민들도 동원되었을 것이다. 여주의 천령현은 광주의 속현이었기 때문에 광주민에 당연히 포함되었다고 보여진다. 광주의 전략적 중요성에 비추어볼 때 광주목 관할하의 대부분의 주민들은 여기에 참여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승리의 대가로 주민 전체에 대한 집단적 포상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한편 여주와 관련하여 충주성 전투도 주목된다.3) 1253년(고종 40) 야굴(也窟)과 역적(逆賊) 홍복원(洪福源)이 이끄는 몽고군은 춘주성(春州城: 춘천)과 양근성(楊根城: 양평)을 거쳐 원주를 포위했으나 함락하지 못하고 천룡성(天龍城: 중원군)을 공격하였는데, 이때 황려현령(黃驪縣令) 정신단(鄭臣旦)과 방호별감 조방언(趙邦彦)이 나아가 항복하였다. 이때 황려현령이 지금의 충주지역인 중원군의 천룡산성(天龍山城)의 방어책임을 맡았다는 점이 주목된다. 여주의 현령이 방어책임을 맡았다고 한다면 여주민 역시 이러한 항전에 참여하였다고 보인다. 최씨정권이 강화로 천도하면서 내륙의 백성들에게 산성이나 해도(海島)로 입보(入保)하라고 독려한 것을 보면, 황려현령이 방어책임을 맡은 천룡산성에 여주민이 입보하였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비록 이때 항복하기는 하였지만, 그 이전에 있었던 여러 차례의 침입에 결연히 맞섰다고 생각된다. 여주는 그 이후 쟈랄타이(車羅大)가 이끈 6차침입에서도 전화를 비켜가지 못하였다. 그것은 여주가 갖는 지리적, 전략적 중요성 때문으로 보인다.

쟈랄타이(車羅大)는 1254년(고종 41) 5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6차침입을 해왔다. 몽고군의 주력은 한 달 후인 8월 22일경에 개경 근방의 장단에 도달하였다. 충주에 이른 것은 9월 중순이었는데, 몽고병의 진로는 양평, 여주, 이천, 안성의 경기지역을 통하여 음성을 거쳐 충주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실은 몽고가 물러나자 고정매(高鼎梅)가 황려·이천·천녕·양근·죽주·음죽의 소부별감(蘇復別監)에 임명되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소부별감은 전화로 말미암아 폐허가 된 지역을 복구하는 책임을 맡은 직책이라고 할 수 있다. 황려·천령 등 여주지역을 포함해 이 지역에 소부별감을 두었다는 것은 이 지역이 몽고군의 전화를 입었음을 말해준다.4) 몽고군이 이 지역을 침구하였을 때 앞서 광주성과 천룡산성의 방어에서 보았던 것처럼 여주민들은 대몽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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