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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무인정권의 성립과 여주지역의 사회동향

고려의 문벌귀족들은 음서제도를 남용하여 관직을 독점하기도 하였고, 경제적으로는 사전(賜田)을 받거나 개간·겸병 등의 방법을 통하여 사유지를 확대하기도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문벌 사이의 세력 균형에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문벌귀족 상호간에 정치적·경제적 우위를 지키기 위하여 상호 항쟁을 벌이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1127년(인종 5)에 일어난 이자겸의 난이라고 할 수 있다.

이자겸(李資謙)은 예종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고 또 그 소생인 인종에게까지 두 딸을 시집보내어 중첩된 외척관계를 맺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다른 귀족들보다 강력한 권한을 쥘 수 있었으며, 심지어는 왕위까지 넘보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자겸의 난에 이어 발생한 묘청의 난 역시 당시 문벌귀족사회가 가지고 있던 모순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묘청의 난이 발생한 원인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것이 귀족세력들 간에 권력장악을 둘러싼 다툼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묘청의 난은 김부식 등 개경귀족들에 의하여 진압되었지만, 당시 사회가 안고 있던 모순은 해결되지 않은 채 지속되었다. 그러한 상황은 결국 무신난(武臣亂)의 발생까지 초래하였다.

이자겸의 난으로 불거져 나온 고려사회의 모순은 단지 정치적 측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커다란 혼란을 가져왔다. 고려사회의 경제적 기반이 되어 왔던 전시과(田柴科) 체제는 이미 12세기 초부터 붕괴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가 무인정권기에 들어오면서 파탄 국면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는 무신 권력자들뿐만 아니라 토호와 승려들도 탈점(奪占)에 나섰으며, 그 대상은 일반 민전(民田)에서부터 양반전·군인전 등 공·사전을 가리지 않고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고려사(高麗史)』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1. ① 무릇 주현(州縣)에는 각기 경회(京外) 양반(兩班)·군인(軍人)의 가전(家田)·영업전(永業田)이 있는데, 이에 간힐(姦黠)한 리민(吏民)이 권요(權要)에 의탁코자 하여 거짓으로 한지(閑地)라 칭하고는 그 집 앞으로 기록을 올리고, 권세자(權勢者)도 또한 아가전(我家田)이라 칭하며 공청(公牒)을 요구·취득하고는 즉시 사환을 보내 서신을 통하여 촉탁하면 그 주(州)의 원료(員僚)들도 간청(干請)을 피하지 못하고 사람을 파견하여 징취(徵取)하므로 일전(一田)에서의 징수가 이에 두세 번에 이르러, 백성들이 고통을 견디기 어렵고 나아가 호소할 곳도 없기 때문에 원분(寃忿)이 하늘을 찔러 재려(灾沴)가 가끔 일어난다(『고려사』 78, 식화지(食貨志)1 전제(田制) 전시과(田柴科), 명종 18년 3월 制).
  2. ② 선왕이 토전(土田)의 제도를 마련하여 공전(公田)을 제외하고는 그 신민(臣民)에게 사여(賜與)하여 각기 차등이 있었는데, 재위자(在位者)들이 탐비(貪鄙)하여 공·사전(公·私田)을 탈점(奪占)해 겸유(兼有)했으므로 일가의 고옥(膏沃)이 주(州)에 차고 군(郡)에 걸쳐 있어서 나라의 부세(賦稅)가 삭감되고 군토(軍士)가 결핍되게 되었습니다. 오직 폐하(陛下)께서는 유사(有司)에게 조직(詔勅)하여 공문(公文)을 모아 증험(證驗)해 무릇 탈점된 것은 모두 본주(本主)에게 돌려주도록 하소서(『고려사』 129, 최충헌전).

위의 기록에서 말하고 있듯이, 무인집권기에 사적인 토지 겸병이 빠르게 확대되어 전시과체제의 붕괴와 함께 새로운 토지 지배 양식인 농장을 성립시켰다. 이의민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최충헌(崔忠獻)도 명종에게 위의 ②사료처럼 권세가에 의한 토지 탈점을 금하도록 주청하였지만, 실제로는 최씨가도 많은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점은 최의(崔竩)가 제거된 뒤에 “낭장(郞將) 박승개(朴承盖)를 경상도로, 내시(內侍) 전종(全琮)을 전라도(全羅道)로 보내 의(竩) 및 만종(萬宗, 최우의 아들)의 노비·전장(田莊)·은백(銀帛)·미곡(米穀)을 적몰하였다.”고 한 데서 짐작할 수 있다. 최씨가는 이러한 농장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많은 사병을 운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농장의 소유주인 권문세족들은 개경에 살고 있는 부재지주였으며, 소유지를 전국 각처에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가신이나 노비를 보내어 조를 징수하였다. 농장을 직접 경작할 경우는 전호나 노비들이 담당하였다. 여주지역에도 개경에 거주하는 귀족들의 소유토지가 산재해 있었다. 여주에 자신의 소유토지를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로 이규보(李奎報)를 들 수 있다. 이규보의 고향은 황려현(黃驪縣)으로 그곳에 소유 토지가 2군데 있었다.1) 토지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 이규보는 노비를 이용하여 자신의 토지를 직접 경작하지 않았다. 개경 근방에 있는 별업(別業)의 경우는 그의 외거노비를 통하여 경작보다는 관리를 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개경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은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양인 농민을 통하여 간접 경작하는 방식을 택하였다.2) 즉 전작제(佃作制)의 경영형태를 띠고 있었다. 가을 추수철이 되면 자신의 사령노비를 파견하여 조를 수취하는 방식으로 토지를 운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사회·경제적 모순을 심화시킨 무신난은 단지 정권담당자의 교체만을 가져오지 않았다. 지배층에서부터 피지배층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에 걸친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다. 그리고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도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특히 무신정권이 성립된 이후에 지방민은 하극상의 풍조에 자극을 받아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반란의 중심에는 농민들이 있었다. 농민들의 동요는 이미 12세기 초 예종 때부터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특히 개경과 가까운 경기나 서해도 지역에서 심하였다. 이들 지역은 중앙귀족들을 위한 공물의 징수나 역역(力役)의 징발이 심하였기 때문이다. 예종이 즉위한 뒤 내린 교서에

지금 제도(諸道) 주군(州郡)의 사옥(司牧) 가운데 청렴(淸廉) 우휼(憂恤)하는 자는 열에 한두 명도 없어, 이익을 좇고 명성을 얻으려고만 하여 대체(大體)를 상하게 하고 있으며, 뇌물을 좋아하고 사리(私利)를 도모하여 생민(生民)을 잔해(殘害)하므로 유망(流亡)이 연이어 열 집 중에 아홉 집이 비었으니 짐은 심히 가슴 아프다.(『고려사』 12, 세가 예종 즉위년 12월)

이 기록은 지방관의 침탈로 말미암아 백성들의 유망(流亡)이 열에 아홉 집이 빌 정도로 심각해졌음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유민화 현상은 무신난이 일어난 의종조에 들어와서 더욱 격화되었으며, 유민들은 일부가 도적으로 변하여 각지에서 많은 소요를 일으켰다. 이러한 소요는 결국 무인정권기 들어서 대규모의 민란으로 이어졌다.

무인정권 아래서 일어난 최초의 민란은 서북지방에서 있었다. 창주(昌州)·성주(成州)·철주(鐵州)의 세 주민들이 지방관의 횡포에 대항하여 봉기하였다. 이 서북지방민들의 항거는 이의방(李義方)·정중부(鄭仲夫)의 제거를 내걸고 기병한 서경 유수 조위총(趙位寵)의 난과 합세하면서 더욱 거세어졌다. 이들의 항거는 2년이 다 되어서야 서경이 함락됨으로써 진압되었다.

무인정권기 민란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1176년(명종 6) 공주 명학소(鳴鶴所)에서 일어난 망이·망소이의 난이다. 망이·망소이 형제는 두 차례에 걸쳐 봉기하였는데, 1차 봉기 때는 공주를 중심으로 동북쪽으로 충주일대까지 장악하였다. 정부는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하고, 지방관을 파견한다는 조건으로 망이·망소이 반란군과 협상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명학소민은 1차 봉기가 있은 지 한 달 만에 다시 반란을 일으켜 가야사(伽倻寺)를 침범하고, 그 기세를 몰아 9일 만에 경기도 여주와 충청북도 진천을 공격하여 장악하였다.3) 그런데 1차봉기 때에는 여러 달 만에 충주를 점령하였던 데 반하여 2차봉기 때는 불과 9일 만에 여주와 진천을 장악하였다. 가야사와의 거리상 9일 만에 이 지역을 장악하는 데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아마도 망이·망소이 무리들이 여주와 진주지역에 별도의 무리들로 나누어 공격하였다고 여겨진다.4) 그렇지만 이들이 1차봉기 때 이러한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다고 보이지 않는다. 2차봉기 때의 분산 공격이 효과적이라는 점을 당시에도 알고 있었겠지만 그럴 만한 상황이 못 되었기 때문에 여러 달이 걸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빠른 시일 내에 여주와 진주를 장악할 수 있었던 점은 아무래도 이 지역의 주민들의 많은 수가 반란군에 참가하였거나 아니면 적극 협조하였던 것이 가장 큰 요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시대에 여주지역은 농토가 비옥하여 궁전과 사원의 장·처(莊·處)가 설치되었으며,5) 귀족들의 소유토지도 이 지역에 많이 위치해 있었다. 무인정권기 지배층의 농민에 대한 수탈과 흉년 등으로 농민들의 삶이 크게 어려워졌으며, 이로 말미암아 민란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여주지역 농민들의 삶도 공주의 명학소와 큰 차이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주 명학소민들이 주장하였던 요구가 여주지역의 백성들에게도 큰 호소력이 있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망이·망소이 반란군이 봉기한 지 9일만에 여주와 진주를 서둘러 장악한 이유는 그들이 봉기를 일으키면서 한 말 가운데서 짐작할 수 있다.

신해(辛亥)에 망이 등이 홍경원(弘慶院)을 불지르고 그곳에 살고 있는 승려 10여 명을 죽이고는, 주지승을 협박하여 그들의 편지를 가지고 서울로 가게 하였다. 대략 내용을 보면, “이미 우리의 고향을 현으로 승격시키고 또 수령을 두어 안무케 하더니, 다시 되돌려 병사를 내어 토벌하고 우리의 어머니와 아내를 잡아 가두니 그 뜻하는 바가 어디에 있느냐. 차라리 창·칼 아래에서 죽을지언정 끝까지 항복한 포로는 되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서울에 이르고 말겠다.”고 하였다.(『고려사』 19, 명종 7년 3월)

명학소민은 1차봉기 때 정부와 사이에 체결된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오히려 군사를 동원하여 무력진압하자 재차 봉기하였다. 이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서울까지 진격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이들의 이러한 각오를 미루어 보면 여주와 진주의 점령은 서울로 진격하기 위한 계획 아래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여주는 충주에서 남한강을 따라 서울로 갈 수 있는 중요한 교통로이다. 고려전기부터 충주에는 덕흥창이 세워져 충청도와 경상도의 전세를 모아 조운으로 운반하였는데, 그 길목에 여주가 위치해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명학소민의 여주 점령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미 1차봉기 때에도 충주를 점령했었는데, 이것은 서울로 가는 조운로를 장악하여 개경 정부를 압박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2차 봉기 때의 여주 점령도 이와 마찬가지였다고 판단된다. 남한강의 수로는 북한강과 합쳐져 흐르다가 임진강과 합류하는 조강을 거쳐 예성강을 거쳐 개성으로 이르는 중요한 교통로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여강(驪江)이 중원(충주)의 월악산으로부터 시작하여 강원도의 오대산 물과 합쳐져 북쪽으로 흐르는데, 이 가운데 마암(馬巖)이 있어 강을 금후에서 막는다고 하였다.6) 그리고 북으로 서울과의 거리가 밤낮 이틀의 노정이고, 남으로는 세 도(道)로 통하는 길이 여주에서 나누어진다고 하였다. 금후(襟喉)는 서울로 이르는 중요한 길목을 의미하는 것으로 중부 내륙에서 서울로 가는 핵심적인 지역이었음을 말해준다. 반대로 서울에서 삼남지방으로 가기 위해서도 통과해야 하는 곳이다.7) 이러한 중요성에 비추어 망이·망소이 반란군들의 여주 점령은 개경정부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그들이 봉기하면서 주창한 대로 반드시 서울에 이르겠다는 그들의 주장이 단순한 엄포가 아니었음을 개경정부에게 주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인다. 그 결과 개경정부는 커다란 위기의식을 느꼈으며 무력으로 이들에 대한 토벌을 단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망이·망소이의 난이 일어난 이후 전주 등에서 민란이 이어졌다. 망이·망소이의 난으로 대표되는 초기무인집권기의 민란은 대체적으로 지방관이나 향리들의 가렴주구에 항거하여 일어났다는 특징이 있다. 아직까지 다른 반란 집단과 연합하거나 신분해방 등 정치적 목적의식이 뚜렷한 민란은 아니었다. 민란은 김사미·효심의 난이 일어났던 명종대 후반기에 접어들어 변화된 양상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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