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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벌귀족사회 불교문화와 여주 고달사

고려초기에 불교계는 새롭게 선종(禪宗)이 유행했다. 선종은 경전에 의하여 그 종파를 구별하는 교종(敎宗)과는 대조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원래 화엄종으로 대표되는 교종은 중앙집권적 체제를 강조하고 골품귀족들의 신분적 특권을 옹호하는 데 이용되고 있었다. 당시의 불교는 왕실불교나 귀족불교로서의 성격이 강하였다. 그러므로 이 교학(敎學) 불교는 지역적으로도 자연히 경주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일반 백성들과 유리되어갔으며 나아가서 난해한 이론에만 치우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선종은 이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것이었다. 즉 선종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 견성오도(見性悟道),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하여 복잡한 교리를 떠나서 좌선을 통해 심성을 도야함으로써 스스로 불성을 깨닫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선종은 개인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다. 선종이 크게 유행한 것은 지방의 호족들로부터 환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선종 9산은 대부분 호족들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한편 고려불교는 교계의 발전보다는 현실생활과의 접촉면에서 더 사회적인 중요성을 나타내고 있었다. 고려의 귀족들도 여전히 불교를 국가나 개인의 현세에 있어서 행복을 좌우하는 현세 이익의 종교로 생각하였다. 공덕을 쌓음으로써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공덕사상이 그 뒷받침이 되었다. 많은 사찰을 세우고 각종 불교행사를 게을리하지 않은 것이 모두 그러한 때문이었다. 또 국가적인 불교행사가 행해졌고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 연등회와 팔관회였다. 한편 불교의 숭상은 과거제도의 시행에 따라 승과제도를 창설케 하였다. 승려들은 국가로부터 토지를 급여로 받았고 역의 의무에서 면제되었다. 사원은 많은 토지를 소유하여 경제적으로도 부유해갔다.

고려시대 여주지방의 불교문화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전해주는 자료는 별로 없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현재 전하는 불교사찰 및 그 유지(遺址)들을 중심으로 간단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1993년에 사적 제382호로 지정된 고달사지는 여주지역의 대표적인 사찰유적이다. 고달사지는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혜목산에 위치하며, 약 1만 2,000여 평에 달하는 절터에는 국보 제4호로 지정된 고달사지 승탑을 비롯하여 고달사지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제 및 이수(보물 제6호), 고달사지 원종대사혜진탑(보물 제7호), 고달사지 석조대좌(보물 제8호)가 있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고달사지 쌍사자석등(보물 제282호)도 1959년 고달사지에서 이전된 것이다.1) 이처럼 고달사는 불교사뿐만 아니라 문헌사, 고고학, 건축사, 미술사 등 관련 학계에서 일찍부터 그 중요성이 인식되어 높은 관심을 받았다.

고달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2) 고달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선사들의 행적이 기록된 비문을 통하여 고달사의 연혁과 불교사적 위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살펴볼 수 있다. 고달사는 신라 말 9산선문(九山禪門) 중의 하나인 봉림산문의 개조로 알려진 원감대사 현욱(圓鑑大師 玄昱 : 787~868)이 도당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혜목산 고달사에 주거하던 9세기 무렵에 크게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신라왕실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다. 이 후 그의 제자 진경대사 심희(眞鏡大師 審希 : 854~923)가 고달사에 거주하다가 김해의 봉림사로 이주하자, 다시 그의 제자인 원종대사 찬유(元宗大師 璨幽 : 869~958)가 거주하게 되고 봉림산문에 속하게 되었다. 그 후 찬유가 중국에 유학하자 한때 후원세력을 찾지 못하여, 사세가 잠시 위축되었으나 찬유가 중국 유학에서 돌아와 다시 고달사에 머물면서 고려 왕실과 연결되고, 태조 왕건 이후 혜종·정종·광종의 후원 속에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고려전기 고달사의 역사 및 그 불교사적 위치에 대해서 연구자들은 대체로 3시기로 구분하고 있거니와, 제1기는 840년~890년으로 현욱과 심희, 그리고 찬유가 중국으로 유학가기 전에 거주하였던 시기이고, 제2기는 924년~971년으로 찬유가 중국 유학을 마치고 고달사에 거주하며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시기이며, 제3기는 971년~1101년으로 광종과의 관계 속에서 부동선원으로 설정된 이후의 시기이다.3)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고달사가 문헌상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은 『조당집(祖堂集)』17, 동국혜목산화상장(東國慧目山和尙狀)에 보이는 현욱(玄昱)과 관련된 것이다. 이 자료에 의하면, 현욱은 진골 출신으로 37세인 824년(헌덕왕 16)에 당에 가서 마조도일(馬祖道一)의 문하 장경회휘(章敬懷暉)의 밑에서 수학하다가, 837년(희강왕 2)에 왕명에 따라 왕자인 김의종(金義琮)과 함께 귀국하였다. 남악의 실상사에 4년간 머물면서 민애왕, 신무왕, 문성왕, 헌안왕 등이 제자의 예를 표하였으며, 왕궁에서 법을 강설하는 등 신라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개성(開城) 연간(836~840)에 혜목 고달사로 온 것은 수도생활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경문왕은 고달사를 지원하였다. 경문왕이 현욱을 고달사에 머물게 하고 지원을 하였다는 사실은 경주에서 먼 지역의 민심수습 차원이었던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현욱이 고달사에 머문 시기는 대략 840년부터 869년까지 29년간이다.

현욱에 이어 고달사의 법맥을 이은 이는 진경대사 심희(審希)다. 924년(경명왕 8)에 세워진 경명왕 자신이 찬술한 「봉림사진경대사비」에 의하면, 심희의 속성은 신김씨(新金氏)로 김유신의 후손이다. 심희는 9살이 되던 862년(경문왕 2) 혜목산에 나아가 현욱을 뵙고 출가하였다. 15세인 869년(경문왕 9)에 현욱이 입적하자 심인을 받았고, 872년(경문왕 12)에 구족계를 받은 후 혜목산을 떠나 여러 곳을 떠돌다가 김해에서 김해 호족인 김인광과 소율희의 후원을 받아 봉림사를 창건하였다.

심희의 대표적인 제자는 찬유이다. 찬유는 고달사에서 출가하여 심희의 법맥을 이었으나, 892년 당으로 유학한 후 거의 30년간 머물다가 921년 귀국한 후 924년 태조를 만났고, 고달사에 돌아와 이를 다시 부흥시켰다. 찬유가 고달사에 머물면서 불법을 전파하자 신도들이 구름같이 모였다고 한다. 태조는 가납의(霞納衣)와 좌구(座具)를 보냈고, 이어 혜종과 정종도 법의를 보내 후의를 표시하였다. 또한 949년 광종이 즉위하자 찬유는 광종에게 ‘심왕(心王)의 묘결(妙訣)’과 ‘각제(覺帝)의 미언(微言)’을 설법하여 많은 대중들의 호응을 받았고, 광종은 그에게 증진대사(證眞大師)의 호를 내리고 궁궐로 불러들였다. 다음 국사로 봉해졌고 왕으로부터 많은 선물을 하사받고 혜목산으로 물러나 제자교육에 진력하다가 958년(광종 9)에 입적하였다. 광종이 즉위 초에 봉암사의 긍양(878~956)과 고달사의 찬유를 각각 불러 사나선원(舍那禪院)에 머물게 하고 설법을 들었는데, 광종이 이들을 부른 것은 이들이 선교일치 사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4)

찬유가 입적한 후 광종은 971년(광종 22)에 원화전(元和殿)에서 대장경을 읽다가 고달원, 희양원, 도봉원을 문하제자들이 이어 주지하여 대대로 끊어지지 않게 하라는 소위 부동선원을 선포하였다. 이리하여 세 곳의 부동선원은 각각 찬유·긍양·혜거가 머물렀던 곳이다. 고달사는 부동선원으로 정해진 후 다음해에 지종(智宗)이 중국에서 귀국하였으며, 광종은 지종이 귀국하자 법안종에 관심을 기울였다. 고달사도 이후 법안종계 선원으로 이어지게 되었다가 대각국사 의천의 천태종 개창을 계기로 천태종으로 흡수되었다. 즉 대각국사비에 의하면,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할 때 고달사는 거돈사·영암사·지곡사·신사와 함께 참여하였다고 한다. 이들 5산문은 모두 법안종과 관련이 있던 곳으로,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할 때 기존의 법안종을 기반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법안종이 교선의 대립을 절충하고 정토신앙을 모두 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천은 기존의 천태사상과 법안종의 사상체계를 바탕으로 천태종을 개창하였던 것이다. 고달사가 천태종의 개창에 참여하였지만, 그 이후는 의천에 들어간 문하생과 5산문과의 주도권을 둘러싼 분열로,5) 의천이 입적한 후 5산문은 본래의 산사로 돌아가게 되었으며,6) 더 이상 천태종 내에서 중심사찰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 고달사는 천태종 주도세력에게서 밀려나 지방사원으로서의 명맥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여주를 본향으로 하고 있는 이규보가 『동국이상국집』에서 고달사에 대한 이렇다 하게 언급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미 고려 중기 이후 고달사의 위치는 점점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조선초 1530년(중종 9)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달사가 취암사·상원사와 더불어 혜목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16세기 전반까지는 고달사가 사찰로서 명맥이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달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1799년(정조 23)에 쓴 『범우고』에 비로소 고달사가 폐사지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적어도 18세기 말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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