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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벌귀족사회의 성립과 여주의 성관세력의 분석

고려 건국 이후 한동안은 호족세력들이 아직도 지방사회에서 반독자적인 세력으로 잔존하고 있었다. 흔히 이를 귀족연합정권으로 부르고 있거니와 그러나 점차 고려사회는 귀족정치를 지향하게 되었다. 4대 광종의 개혁을 거치면서 과거를 통해 새로운 학자층이 관료로 진출하기 시작하였고 점차 정치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6대 성종대에 이르면 신라 6두품 계통의 유학자들이 정치일선에 대거 등장하였고, 그 대표적인 인물이 최승로였다. 최승로의 건의로 귀족중심의 정치체제가 확립되어갔던 것이다. 처음으로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고 고려 향리제도의 실시를 의미하는 향직개혁을 실시하여 지방호족들의 지위를 격하시켰다. 한편 지방호족들은 되도록 중앙귀족으로 흡수하려고 노력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고려사회를 흔히 문벌귀족사회라고 한다. 최근 들어 관료제사회로 보려는 새로운 견해가 제기되고 있긴 하지만, 종래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고려사회는 혈통을 존중하는 신분제 사회였고 상위 신분층이 사회의 지배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귀족사회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고려는 신라가 왕족인 김씨 진골중심의 정치를 했던 것과는 달리 여러 이성(異姓) 귀족들에 의한 정치를 해나갔다. 이들 이성 귀족들은 원래 호족이던 때의 출신지를 본관으로 칭하였고, 이 본관은 그들의 세력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 이리하여 문벌이라는 것이 중요시되었고, 호적이 평민과는 별도로 작성되었다. 문벌귀족들은 자기 가문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혼인정책을 사용하였다. 통혼의 대상이 되는 가문이 사회적으로 유력한 가문일수록 명예로운 일이었고 빨리 출세할 수 있는 길이 되었다. 이리하여 명문세족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여주의 토성으로 민(閔)·이(李)·안(安)·필(畢)·윤(尹)·한(韓)·음(陰) 김(金)씨가 있었음은 이미 앞 절에서 언급하였거니와, 특히 이 중에서 중앙의 사족(士族)으로 진출하여 문벌귀족으로 성장한 성씨로는 우선 여흥(驪興) 민씨를 들 수 있다. 여흥 민씨는 황려(黃驪) 민씨라고도 부르는데, 이미 고려초기부터 본읍의 호장직을 세습하고 있었다. 그것은 고려 선종(宣宗) 2년 명반자(銘飯子)에 호장 민씨가 있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1)

한편 여흥 민씨 중에는 이미 고려초기부터 사족으로 성장한 가문도 보인다. 여흥 민씨들 중에 『고려사』 세가에 그 이름이 보이는 인물로 우선 민가거(閔可擧)를 들 수 있다. 그는 덕종 즉위년에 공부상서, 3년에 좌복야를 지낸 중신이다. 아마도 그의 선조는 고려 건국기에 활동한 내군장군 민강(閔剛)이 아닐까 한다. 민가거의 아들로는 지삼사사(知三司使)를 지낸 민창소(閔昌素)와 상서를 지낸 민창수(閔昌壽)가 있고, 판관 민효후(閔孝候)는 민창소의 아들이며, 또 인종조에 함문지후(閤門祗候)를 지낸 민영(閔瑛)이 그의 아들이다.2) 이상 민가거의 가문은 고려전기에 이미 재지 이족에서 과거를 통해 중앙으로 진출하여 문벌귀족으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인종대에 등장한 민영모(閔令謨) 가문은 고려후기에 크게 성장한 가문이다. 그의 증조 민칭도(閔稱道)는 고려초기에 이미 재경 관인으로 줄곧 사환이 지속되었고, 그의 아버지인 민의(閔懿)는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을 역임하였으며, 민영모 자신은 무신집권 초기에 대표적인 문신으로 활약하였다. 그리하여 고려후기의 벌족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였다. 그 두 아들 민식(閔湜)·민공규(閔公珪)를 비롯하여 민지(閔漬)·민사평(閔思平)·민제(閔霽) 등으로 이어지는 가문은 고려후기를 일관하는 사환가인 동시에 문한가로서 신흥사대부의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고려사』 열전에 독립된 전을 갖고 있거나 고려묘지명에 수록되어 있어 그들의 행적을 알 수 있는 인물들이다.3) 이 여흥 민씨는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계속 명문대족(名門大族)의 명맥을 유지해갔으니, 『여지승람』에 보이는 문하 좌정승(門下左政丞)을 지낸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문도공(文度公) 민제(閔霽)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한편 여주 이씨와 여주 김씨 등은 읍사의 호장직을 장악하면서 재지 이족으로 있었다. 여주 이씨는 민씨보다는 좀 늦게 중앙으로 진출하였으나 점차 후기에는 재지 이족(吏族)에서 중앙의 사족(士族)으로 진출하였다. 여주 이씨 중에 중앙귀족으로 성장한 가문은 크게 셋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규보 가문·이행 가문·이언적 가문이 그것이다. 무신집권기에 출사한 참지정사(參知政事) 문순공(文順公) 이규보(李奎報)와 그 손자 이익배(李益培)는 마침내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그들은 여주에 경제적 기반을 갖고 있었다. 고려 말에 신흥사대부의 기수로 조준 등과 함께 전제개혁을 주장했던 이행(李行)도 여주 이씨였다.

여주 김씨는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보이지 않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본읍 성씨조에 다른 토성과 함께 기재되어 있었다 함은 이미 언급하였거니와, 고려 초에 우복야(右僕射)를 지낸 김경염(金慶廉)과 그의 아들과 손자는 각각 검교장작감(檢校將作監)과 태자소사(太子少師)를 지낸 귀족이었으며 이들 가문이 바로 여주 김씨이다. 또 신륵사석종비음기(神勒寺石鐘碑陰記)에 호장(戶長) 직을 맡고 있는 인물로 민씨, 김씨 등이 향리 명단에 기재된 것을 보면 여주 김씨도 여주 민씨와 여주 이씨 등과 함께 재지사족과 재지이족으로 구분되어 파를 달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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