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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의 분정과 여주 토성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우리나라에서 한식(漢式) 성씨가 지배세력 사이에 널리 보급되는 것은 나말여초 호족세력의 성장과 때를 같이한다. 이 시기에 형성된 토착 성씨집단인 토성(土姓)은 그 후 새로운 군현제의 편성과 더불어 주(州)·부(府)·군(郡)·현(縣)의 성이나 촌성(村姓) 또는 향(鄕)·소(所)·부곡(部曲)의 성 등으로 변화되었다. 이렇게 분화된 각 족단의 촌락은 동족이 어울려 사는 혈연집단적 거주지로서 지방행정조직의 말단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지방의 말단 행정단위인 촌의 행정을 담당하는 사람은 촌장(村長), 혹은 촌정(村正)이었다. 이들은 고려가 중앙집권적인 지방지배를 완성한 성종대 이래로 향리와 더불어 향촌의 유력자였다. 이들 향리나 촌장 등을 수장으로 하는 각 촌락은 일촌일성(一村一姓)을 원칙으로, 같은 성씨가 몰려 사는 혈연적 동족집단인 동시에 지역적 촌락공동체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러한 촌락의 구조는 고려후기에 이르러 정치적 사회적인 변화와 그에 따른 지방 통치조직의 재편과 함께 동족이 아닌 타성도 서로 섞여 사는 경우가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따라서 토성의 분포를 파악하는 것은 고려시대 각 지방의 사회적인 구조를 살펴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조에 들어와 15세기 전반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와 『세종실록』 지리지 등에는 각 군현별로 ‘토성(土姓)’이 기재되어 있으며, 토성이라는 용어는 위의 두 지리지에 처음 보인다. ‘토성’이란 고려초기 이래 전래되어오던 중앙 소장의 『군현성씨관계자료』에 기재되어 있던 성씨를 지칭한 것이다. 여기에는 토성 이외에 ‘인리성(人吏姓), ’‘백성성(百姓姓)’ 등과 성씨의 본관에 따라 주(州)·부(府)·군(郡)·현(縣)의 성이나 촌성(村姓) 또는 향(鄕)·소(所)·부곡(部曲)의 성 등이 기재되어 있다. 한편 ‘망성(亡姓),’ ‘내성(來姓),’ ‘속성(續姓)’ 등과 같이 시간적인 변화에 따라 여러 가지 성종(姓種)이 기재되어 있다. 이러한 토성의 형성과정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태조 23년 전국적인 군현의 개편과정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토성의 수는 각 읍세(邑勢)의 규모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대읍은 7~8개의 토성이 있었고 평균적인 군현은 4~5개의 토성이 있었다. 결국 각읍의 토성수는 고려초기 그 군현이 성립될 당시 참가한 구역수 내지 그 구역에 토착하던 족단수와 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후기 이래 군현의 신축과 읍격의 승강이 빈번해지고 또 유망민의 대량 발생과 신분변동이 심해짐에 따라 읍세와 토성수가 반드시 비례하지 않고 변화되어갔다.

재지 토성이 몰락하게 되면 ‘망성’이 되었다. 즉 고려시대의 성씨관계 문헌에는 기재되어 있으나 15세기 지리지 편찬 당시에는 이미 없어진 토성을 망성이라고 하였다.

한편 ‘내성’은 다른 지방에서 옮겨와 고려초기 이래 토착하게 된 성을 말하는 것이다. 토성이 확정된 후 그 토성이 유망 또는 소멸해서 망성이 생기듯이, 이미 다른 지역에서 옮겨온 내성이 그 후 다시 유망하거나 소멸되면 ‘망래성(亡來姓)’이 되었다. 성씨의 이동이 많았던 곳에는 망래성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토착적인 기반이 약한 이주 성이 쉽게 정착하지 못하고 전쟁이나 흉년 등으로 다시 다른 지역으로 유망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다음 ‘속성(續姓)’이 있는데, 이는 각 읍 성씨조의 맨끝에 기재되어 있고 반드시 래성의 다음에 기재되었다. 속성은 고려시대의 성씨관계 문헌에는 없고 그 대신 15세기 지리지 편찬 당시에 각 도의 보고서에 기재된 성씨를 말한다. 따라서 속성은 내성과 마찬가지로 다른 지역으로부터 옮겨와 토착한 성씨를 말한다. 다만 내성과 속성과의 차이는 그 형성시기의 차이에서 오는 것으로 내성은 고려초기부터 형성된 성씨인 데 반해서 속성은 고려후기 혹은 고려 말 조선 초에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속성은 촌(村)을 제외하고는 주(州)·군(郡)·현(縣)과 속현(屬縣) 및 향(鄕)·소(所)·부곡(部曲)에도 있었고 심지어는 역(驛)에도 있었다. 즉 속성은 고려후기 외적의 침입 등 격심한 사회변동으로 말미암아 토착 성씨들의 이동이 심해지자, 향리자원의 보충을 목적으로 각 지역간 조정을 한 결과 본격적으로 형성되어갔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각 군현의 토성관계 기록은 그 지방의 혈족집단의 형성과 그 변동과정 등의 내력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아주 중요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여주에는 토성이 7개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민(閔)·이(李)·안(安)·필(畢)·윤(尹)·한(韓)·음(陰) 씨가 그것이다.1) 그런데 특이한 점은 다른 군현의 예와는 달리 여주에는 속성, 내성, 망성 등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편 『동국여지승람』본읍 성씨조에는 8개 성씨가 기록되어있다. 즉 위의 『세종실록』지리지에 보이는 7개 성씨에 김씨가 더 추가되어 있다. 어떠한 연유인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세종실록』 지리지의 누락으로 여겨진다.2) 천령현의 성씨로는 견(堅)·현(玄)·최(崔)·유(兪)·방(房)·장(張)의 6개 성씨가, 그리고 등신장에는 유(兪)씨가 토착 성씨로 기록되어 있다.

여주의 토성 중에는 여흥 민씨와 여주 이씨, 그리고 여주 김씨가 가장 두드러진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상술할 예정이거니와, 여흥 민씨는 고려초기부터 이미 사족으로 성장하였고, 여주 이씨와 김씨는 중기 이후 중앙으로 진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여주 민씨와 이씨·김씨 등은 읍사(邑司)의 호장(戶長) 직을 장악하면서 재지 이족(在地 吏族)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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