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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통치체제의 정비와 여주의 연혁·행정구역 개편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송악(개성)지방의 호족의 자제였다. 왕건은 처음 궁예의 부하로 들어가 많은 전쟁을 통해 공을 세웠으며 드디어 궁예정부의 시중이 되었다. 그는 918년 쿠데타를 일으켜 궁예를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다. 왕건은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고 도읍을 철원에서 송악으로 옮겼다. 자신의 본거지인 송악으로 수도를 옮김으로써 왕건은 정치적 군사적인 기반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936년 후삼국을 통합한 고려는 태조 23년(940) 전국의 군현 명칭을 개정하고 삼한공신을 책정하였다. 혜종·정종대를 거쳐 광종대에는 일련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노비안검법, 과거제도, 칭제건원, 공복 제정 등 과감한 개혁을 통해 왕권을 확립하고 호족세력을 억압하였다.

결국 성종대에 이르러서야 중앙 및 지방의 통치체제가 정비되었다. 우선 중앙정치기구는 성종대에 정비되기 시작하여 문종대에 완비되었다. 중앙관제는 중서성·문하성·상서성의 3성이 중심이었다. 3성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중서성과 문하성이었다. 이를 합쳐서 중서문하성, 혹은 재부(宰府)라고 불렀다. 한편 상서성은 정책 시행을 담당하는 집행기구였다. 상서성은 2품 이상으로 구성되는 상서도성과 3품 이하로 조직된 상서 6부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었는데, 이 중 일반 행정을 맡아 집행한 것은 상서 6부였다. 6부는 이(吏)·병(兵)·호(戶)·형(刑)·예(禮)·공(工)의 여섯 부를 말한다. 3성 이외에 중요한 지위를 지니는 것으로 중추원과 삼사가 있었다. 이 중 중추원은 왕명의 출납과 군기를 장악하는 것이 그 중요한 임무였다. 삼사는 세공과 녹봉 등을 관장하여 그에 대한 회계를 총괄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이 밖에 시정의 득실을 논하고 풍속의 교정, 관리의 잘못을 탄핵·규탄하는 임무를 맡은 어사대, 왕명과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은 한림원이 있었다.

군사조직으로는 서울에 보통 경군(京軍)으로 불리는 중앙군을, 그리고 지방에는 주현군(州縣軍)을 두고 있었다. 중앙군은 2군 6위가 중심이었다. 2군 6위에는 각기 정·부지휘관으로 상장군(정3품)·대장군(종3품)이 있었다. 2군 6위 밑에는 1천 명의 군인으로 조직된 45개의 영(領)이 있고, 영의 지휘관은 장군(정4품)이었다. 이에 비해 지방에는 주현군이 설치되어 있었다. 같은 지방군이면서도 5도 및 경기의 주현군과 북방 양계의 그들과는 성격이 좀 달랐다. 따라서 양계의 주현군을 따로 주진군(州鎭軍)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과거라는 시험제도가 처음 도입된 것은 고려 광종 9년(985)이다. 과거시험은 그 과목에 따라 제술업(製述業)·명경업(明經業)·잡업(雜業)의 셋으로 나뉘었다. 제술업은 시(詩)·부(賦)·송(頌)·책(策) 등의 문학으로 명경업은 서(書)·역(易)·시(詩)·춘추(春秋) 등의 유교 경전을 시험보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잡업은 기술관 등용을 위한 시험이었다. 고려에서는 양인이면 누구나 수험자격을 갖고 있었지만, 천민이나 승려의 자식은 응시할 수 없었다. 비록 양인이라 하더라도 일반 농민은 거의 응시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고려시대의 중요한 교육기관으로 중앙에는 국자감과 12도, 지방에는 향교가 있었다.

토지제도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전시과(田柴科)였다. 전시과는 976년(경종 원년)에 처음으로 제정되어, 998년(목종 원년)과 1076년(문종 30)에 이르러 재편성되었다. 전시과의 규정에 따라 주어지는 과전(科田)은 관리에 대한 보수였던 셈이다. 따라서 그가 죽으면 국가에 반납하게 되어 있었다. 전시과 이외에 중요한 것이 공음전(功蔭田)이었다. 공음전은 대체로 5품 이상의 관리에게 토지를 주어, 이를 자손에게 세습시키는 것을 허락한 영업전이었다. 과전과 공음전 이외에 중요한 것은 향리와 군인에게 주는 전정(田丁)이었다. 향리들이 받는 향리전(鄕吏田, 또는 外役田)은 그들이 짊어지는 향역의 댓가였다. 군인전 역시 군역의 댓가로 주는 토지였다. 이 밖에 궁성에 소속되어 있는 내장전, 관아의 비용에 충당되는 공해전, 사원이 소유하는 사원전 등이 있었다.

한편 고려의 중앙정부가 외관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해 본격적인 통제를 가하기 시작한 것은 983년(성종 2) 12목(牧)을 설치하면서부터였다. 양주(楊州), 광주(廣州), 충주(忠州), 청주(淸州), 공주(公州), 진주(晋州), 상주(尙州), 전주(全州), 나주(羅州), 승주(昇州), 해주(海州), 황주(黃州)에 12목을 설치하고 목사(牧使)를 파견함으로써 본격적인 지방통제를 실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몇 차례의 변화과정을 거쳐서 1018년(현종 9)에 지방제도는 일단락을 지었다.

고려시대에는 전국을 5도와 양계로 크게 나누고, 그 안에 3경·5도호부·8목을 위시하여 군·현·진 등을 설치하였다. 도는 일반행정구획으로서, 경우에 따라 증감이 있었으나 뒤에 5도로 낙착되었다. 도의 장관은 안찰사였다. 북방의 국경지대에는 동계·북계(서계)의 양계를 설치하였는데, 군사적인 특수지역이었다. 따라서 외관제가 발달하여 일찍부터 계의 장관인 병마사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지방행정 단위에는 외관(外官)이 파견되었다. 물론 모든 군현에 외관(外官)이 파견된 것은 아니었다. 외관이 파견된 군현과 그들이 파견되지 않은 속군(屬郡)·속현(屬縣)이 있었다. 따라서 외관이 없는 속군·속현은 주군(主郡)·주현(主縣)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앙과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고려 군현제도의 한 특징이다. 즉 군·현의 크기가 문제된 것이 아니라 외관이 파견되는 주군·주현이냐, 그렇지 않으면 외관이 없는 속군·속현이냐가 더 중요한 것이었다. 이처럼 고려의 중앙정부에서는 여러 군현 중 외관이 파견된 군현에만 직접 행정체계가 미치고 이로 하여금 속현을 관할케 하였다. 그러나 주군현의 수가 많아 이를 일률적으로 통제하기가 곤란하였으므로 몇 개의 큰 군현을 계수관(界首官)으로 삼아 중간기구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즉 14개 정도의 경·도호부·목이 계수관으로서 관내의 일반 군현을 통할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군현이라 하더라도 고려의 군현제는 계수관과 일반 군현, 그리고 속군현 등 누층적인 구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외관 밑에는 호장(戶長) 이하의 향리가 있어서, 외관을 보좌하고 일반 국민과 접촉하는 실제적인 행정사무를 담당하였다. 즉 조세와 역역의 징수를 비롯하여 간단한 소송을 처리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맡고 있었다. 그들은 비록 관인은 아니었지만 국가권력의 말단을 장악하여 일반 백성들과 직접 접촉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 역할은 매우 컸다. 호장 등 향리들은 그 지방 본래의 호족 출신인 토착세력가들이므로 짧은 기간을 두고 교체하는 군현의 장관들보다 지방 사정에 능통하여 영향력이 매우 컸다. 그리고 군현 밑에는 촌으로 구분되었는데, 촌에는 토착인인 촌장(村長) 등이 있어서 그들이 촌민을 지배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전국에 약 500여 개의 군현이 존재하였지만,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고려전기에 수령이 파견된 주현이 130개였는 데 반하여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은 374개나 되었다. 고려시대의 여주는 천녕군의 속현이었다.

이제 여주의 연혁과 행정구역의 정비에 대해 구체적으로 검토해보고자 한다. 우선 관련 사료부터 보자.

  1. 소천군(泝川郡)(소(泝)는 기(沂)라고도 썼다)은 본래 고구려 술천군(述川郡)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천녕군(川寧郡)이다. 영현이 둘이다. 황효현(黃驍縣)은 본래 고구려 골내근현(骨乃斤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황려현(黃驪縣)이다. 빈양현(濱陽縣)은 본래 고구려 양근현(楊根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예전대로 회복하였다.1)
  2. 황려현(黃驪縣)은 본래 고구려의 골내근현(骨乃斤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황효(黃驍)로 고쳐 기천군(沂川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바꿨다.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고종(高宗) 44년에 영의(永義)라 칭하고 충렬왕(忠烈王) 31년에 황비(皇) 순경왕후(順敬王后) 김씨(金氏)의 내향(內鄕)이므로 올려 여흥군(驪興郡)으로 삼았고 명(明) 홍무(洪武) 21년에 이르러 거짓 임금 신우(辛禑)를 군(郡)으로 옮기매 올려 황려부(黃驪府)로 삼았다가 공양왕(恭讓王) 원년(元年)에 다시 내려 여흥군(驪興郡)으로 하였다.2)
  3. 본래 고구려의 골내근현(骨乃斤縣)인데, (중략) 고려에서 황려(黃驪)로 고쳐서, 현종(顯宗) 무오에 원주(原州)의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중략) 본조(本朝) 태종(太宗) 원년 신사에 중궁정비(中宮靜妃)의 내향으로서 여흥부로 승격시켜 음죽현(陰竹縣)의 북촌(北村) 어서이처(於西伊處)를 떼어주고, 13년 계사에 도호부(都護府)로 고치었다.3)
  4. 본래 고구려의 골내근현이다. (중략) 본조 태종조에 원경왕후의 고향이므로 다시 승격하여 부로 하고 음죽현 북쪽 어서이촌(於西伊村)을 합하여 충청도로부터 본도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고쳐 도호부로 했다. 예종 원년에 영릉을 부(府)의 북성산에 옮기고 천령현을 혁파하여 이부에 소속시키고, 지금 이름으로 쳐 승격시켜 목으로 하였다.4)

좀 장황하고 중복되지만, 『삼국사기』·『고려사』·『세종실록』·『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이는 여주의 연혁 변천을 살펴보았다.

위의 사료들을 통해 여주의 연혁을 살펴보면, 지금의 여주는 본래 고구려의 술천군(述川郡) 골내근현(骨乃斤縣)으로 신라 중고기에 신라의 영토가 되었던 것으로 보이며,5) 556년(진흥왕 17)경에 골내근정이 설치되었고, 문무왕대에는 남한산주(南漢山州)에, 경덕왕대에는 한주(漢州)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 여주는 한주에 속한 기천군(沂川郡)의 속현인 황효현(黃驍縣)이 되었다.

고려 초에는 황려현(黃驪縣)으로 개명하였는데, 975년(광종 26)에 세워진 혜목산고달선원원종대사비에 “廣州慧目山”으로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광주의 관할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주의 주치소(州治所)였던 광주는 본래 궁예의 부하였던 왕건에 의해 900년(광화 3)에 충주·당성·청주·괴양 등과 함께 평정되어 궁예정권에 속하게 되었다.6) 따라서 광주에 속해 있던 여주 역시 처음에는 궁예에 속해 있다가 왕건의 고려 건국 후에는 고려에 귀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여주는 1018년(현종 9) 원주에 속한 5개의 속현 중 하나가 되었다가, 이후 감무가 설치되었다. 1257년(고종 44) 영의(永義)로 고쳤고, 다시 충렬왕대에는 순경왕후 김씨의 내향이 되었기 때문에 여흥군(驪興郡)으로 승격되었다가, 1388년(홍무 21) 우왕을 폐하고 여주군에 옮겼으므로 이로 인해 황려부로 승격되었고, 공양왕 원년에 다시 여흥군으로 강등되었다. 조선 태종(太宗) 원년(1400)에 정비(靜妃)의 내향이라 하여 다시 여흥부로 승격되고 이웃 음죽현(陰竹縣)의 북촌(北村)인 어서이처(於西伊處)를 떼어주었으며, 1413년(태종 13)에는 다시 도호부(都護府)로 고치었다. 여주라는 지명은 조선 예종 원년(1469)에 붙여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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