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의 비상 여주시 여주시사

HOME 주제 역사 선사·고대사회의... 통일신라기의 사... 신라 하대의 혼...

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신라 하대의 혼란과 여주지역의 동향

신라 중대의 전제왕권은 혜공왕이 선덕왕에게 죽임을 당한 이후 진골 귀족들의 왕위를 둘러싼 쟁탈전이 계속되면서 점차 붕괴되었다. 신라 하대의 중앙 귀족의 왕위쟁탈전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의 약화를 가져왔고, 점차 지방세력인 호족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여주지역에서도 지역민들의 봉기가 있었다. 즉 825년(헌덕왕 17) 정월에 김헌창의 아들 범문(梵文)이 고달산의 산적 수신(壽神) 등 100여 명과 더불어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수도를 평양(平壤 : 서울 부근)에 정하려고 북한산성을 공격했으나 한주 도독 총명(聰明)이 거느린 군대에 의해서 곧바로 진압되었다. 범문의 난은 바로 여주지역 고달산 일대가 주무대였던 것이다. 범문은 822년(헌덕왕 14)에 반란을 일으킨 김헌창의 아들이다.

김헌창은 초적(草賊)이 봉기하는 등 민심이 흉흉해진 틈을 이용하여 웅천주도독(熊川州都督 : 공주)으로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김헌창은 무열왕계 후손인 김주원(金周元)의 아들로, 김주원은 785년(선덕왕 6) 원성왕과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경쟁을 벌이다가 실패하여 강릉에 은거하였다. 그 후 그의 두 아들은 원성왕계의 조정에 참여하여 시중직 등 고위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김헌창은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그 대신 원성왕이 즉위한 것에 불만을 품고 웅천주를 근거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하여 반란의 기치를 높이 세웠다. 그의 반란군은 처음에는 무진(광주)·완산(전주)·청주(진주)·사벌(상주)의 4주 도독과 중원(中原)·서원(西原)·금관(金官)의 3소경 사신(仕臣) 및 그 밖에 여러 군현의 수령을 협박하여 반란세력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곧 청주도독 향영(向榮)이 탈주에 성공하고 완산주장사(完山州長史) 최웅(崔雄) 등이 왕경으로 달려와 반란 사실을 고함에 따라 조정은 곧바로 반란 진압에 들어가 웅진성을 포위하였고 성이 함락되기 직전 김헌창이 자살함으로써 반란은 진압되었다. 이 반란에 연좌되어 죽임을 당한 사람은 모두 239명에 달했다.

범문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반란을 일으켜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처럼 두 차례에 걸친 김헌창 부자의 반란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것이 앞으로 닥쳐올 사태의 진전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첫째로 이 반란은 호족 세력의 지방할거적 경향을 크게 촉진시켰고, 둘째로는 830년대 후반 원성왕계 내부의 왕위계승 쟁탈전을 유발하는 한 심리적 요인이 되었다.1)

김헌창-범문으로 이어지는 태종무열왕계의 왕위 도모는 중앙의 왕위 쟁탈전이 점차 지방으로 확대되어, 지방세력 스스로도 반신라적인 성향을 보이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범문의 반란에 참여한 여주지역의 고달산 산적 수신의 동향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앞서 김헌창의 반란은 주로 지방에 파견된 지방관 또는 휘하의 병력을 동원하려 한 것인데 비해 범문의 반란은 신라 하대 초적, 산적이라 표현된 유망 농민층이 동원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점차 반란의 주체가 농민군 위주로 바뀌고 있어 후삼국 전개의 전초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고달산 산적 수신과 관련된 사적은 발견된 예가 없다. 그러나 그가 산적으로만 표현되고 출자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는 점은 그의 휘하에 많은 하층민들이 참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농민층의 동향이 앞서 살펴본 원종대사의 활동에서 보듯이 고려 왕실로 하여금 여주지역에 대한 배려와 지원을 이끌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김헌창-범문 부자의 반란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점은 같은 김주원계의 후손들이 호족으로 등장하여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였던 명주(강릉)와의 관련성이다. 명주의 호족들은 낙향 귀족으로, 김주원이 중앙에서 왕위계승전에서 패배하여 자신의 연고지인 명주에 은거하여 세력화한 집단이다. 김주원은 명주는 물론 양양·삼척·평해·울진 등 영동지역 일대에 독자적 세력권을 형성하였는데 이러한 세력권은 물론 그의 후손에게 계승되었다.

신라 말 명주에서는 김순식(金順式, 후에 王氏 賜姓)이 명주장군(溟州將軍) 혹은 지명주군주사(知溟州軍州事)로서 강력한 호족세력으로 등장하여 명주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궁예세력이었는데 왕건 즉위 후에도 오랫동안 불복하다가 928년(태조 11)에 이르러 귀부하였다. 김순식은 대체로 김주원의 후손으로 이해되는데, 그가 호족으로 성장하는 데에는 김주원계의 세력기반에 힘입은 바가 크다. 명주에는 또한 왕예(王乂)라는 호족이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그는 김주원의 직계 후손으로 왕성을 하사받았는데 그의 딸은 왕건에게 납비되기도 하였다.

또한 여주지역의 호족세력과 관련하여 양길(梁吉)이란 자가 있다. 궁예가 죽주(竹州)의 기훤(箕萱)에게 무시당하고 찾아간 양길은 894년 600명의 병력으로 궁예를 시켜 북원에서 명주로 들어가 김주원계와 연대를 통해 명주 관내의 여러 군현을 정복하도록 하였다. 899년 궁예에 의해 격파되기 이전 양길은 광주(廣州)로부터 남한강 유역의 요지인 북원(원주)·국원(충주)과 인근 등 30여 성주와 연결을 맺고 있었던 대표적인 호족이다. 양길은 후백제의 견훤이 비장직(裨將職)을 제수하기까지 하였다.

여주지역도 이처럼 남한강 중상류와 영동지역을 아우르던 양길의 관할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양길이 궁예에 패한 후 다시 여주지역은 궁예에 속하게 되었고, 고려 태조가 즉위한 이후 앞서 불교문화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려 왕실의 직접적인 지원하에 불사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볼 때 태조의 즉위에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맨 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