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의 비상 여주시 여주시사

HOME 주제 역사 선사·고대사회의... 통일신라기의 사... 신륵사·고달사의...

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신륵사·고달사의 창건과 여주지역의 불교문화

신라 말에는 교설보다는 참선 수행을 위주로 하는 선종이 크게 유행하여 선종 위주의 불교관이 제시되었다. 따라서 교학 불교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으나 의상(義湘)의 화엄종을 비롯하여 법상종 등이 꾸준히 그 세력을 유지하였다. 화엄종은 의상과 법장(法藏)이 갈등과 조화를 유지하는 가운데 신라 전제왕권의 지지와 비호를 받아 교세를 유지하였고, 법상종도 역시 태현(太賢)과 진표(眞表)의 대립 속에서 꾸준한 발전을 이루었다. 신라 말의 불교계는 교종보다는 선종이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였다. 교종 불교나 중앙귀족의 일정한 연관을 지닌 북종선(北宗禪)보다 도의(道義)의 남종선(南宗禪)이 선문구산(禪門九山)으로 확대되면서 신라 말의 교단은 지방으로 확대되었다. 선종 9산의 성립 과정에서 실상산문(實相山門)처럼 왕실과 관계를 맺는 경우가 있었지만, 대체로 호족의 세력기반을 배경으로 성장하였다. 예로 강릉의 사굴산문이 김주원 가문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선종산문은 광대한 토지와 문도(門徒)를 소유하며 강력한 지방세력으로 군림하게 되었다.1)

신라 말 여주지역의 대표적인 사찰은 신륵사(神勒寺)와 고달사(高達寺, 사적 제382호)이다. 여주시 천송동에 위치한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통일신라 당시 신륵사의 규모나 성세를 알 수는 없지만 신륵사와 관련하여 전해오는 연기설화를 통해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즉 절 이름을 ‘신륵’이라 한 데는 미륵 또는 왕사 나옹(懶翁)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나타난 용마가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웠으므로 신력(神力)으로 제압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현재 사찰과 같은 사역을 갖추게 된 것은 나옹이 이곳에서 여러 이적(異蹟)을 보이고 입적하였기 때문이다. 나옹이 입적할 때 오색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구름도 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렸으며, 수많은 사리가 나왔고 용이 호상(護喪)하였다는 것 등이다. 3개월 뒤인 1376년(우왕 2) 8월 15일에 절의 북쪽 언덕에 사리를 봉안한 부도를 세우고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졌다. 현재 사찰에 남아 있는 대부분의 당우와 유물은 고려~조선시대에 걸친 것들이다.

북내면 상교리의 고달사는 764년(경덕왕 23)에 창건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나, 당시의 유물은 전하는 것이 없고 대부분 고려 초기의 신라 양식을 계승한 유물뿐이다. 그러나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 창건 연대를 말해주는 유구와 유물이 출토되어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사찰로 밝혀졌다.

기록에 의하면 고달사는 구산선문의 하나인 봉림산문(鳳林山門)의 개조로 알려진 원감대사(圓鑑大師) 현욱(玄昱, 787~868)이 824년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장경(章敬)의 법을 받고 837년(희강왕 2)에 귀국한 뒤 경문왕의 청으로 혜목산(慧目山) 고달사에서 거주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고달사는 9세기 무렵 이미 사찰로 운영되었으며, 현욱은 868년(경문왕 8) 혜목산에서 입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욱의 제자로 봉림산문을 개창한 진경대사(眞鏡大師) 심희(審希, 854~923)는 9세의 나이로 출가하여 혜목산에서 현욱의 가르침을 받고 873년 열아홉에 구족계를 받았다. 심희는 혜목산에서 송계선원으로 나아가면서 진성여왕의 청을 거절하고 김해지방의 가야계 김씨 세력인 김율희와 김인광 등과 연결되어 봉림사를 열었다. 심희가 왕실의 청을 거절한 것은 송계선원의 단월(檀越) 세력들이 반신라적 성향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성여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효공왕은 봉림사에 머물고 있는 심희에게 귀의하여 그의 도움으로 김해 지역의 호족세력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후 그는 왕건과 연결되어 918년에는 고려 왕실에 나가기도 하였다.

심희의 제자 찬유(璨幽) 원종대사(元宗大師)의 행적은 고달사지의 원종대사혜진탑비(元宗大師慧眞塔碑)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원종대사는 주로 고려 초기 30여 년 간에 걸쳐 활동한 고승으로 법명은 찬유이다. 그는 869년(경문왕 9)에 출생하였는데 속성(俗姓)은 김씨로 계림하남인(鷄林河南人, 경주인)이다. 대대로 명문 가문으로 조부의 자취는 확인할 수 없으나 부친 때 가문을 일으켜 창부낭중(倉部郎中)이 되고 얼마 후 장사현령(長沙縣令, 전북 무장)이 되었다고 한다. 13세가 못 되어 출가하여 여주 혜목산의 종선화상(宗禪和尙)에게 가르침을 받고, 22세에 양주 삼각산 장의사(莊義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892년(진성왕 6)에 당나라로 건너가 석두(石頭)의 법손(法孫)인 자상화상(子祥和尙)의 제자가 되었으며, 921년(경명왕 5)에 귀국하여 삼랑사(三郞寺) 주지가 되었다. 그 후 고려 태조가 천명(天命)을 기다려 흥기한다는 것을 듣고 찾아가 광주 천왕사(天王寺) 주지로 있었으며, 다시 여주 혜목산으로 옮겨 주석하였다. 태조 이후 혜종·정종·광종을 거쳐 계속 고려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광종때 왕사가 되어 증진대사(證眞大師)의 호(號)를 받고, 또 얼마 후 국사가 되었다. 958년(광종 9) 90세에 혜월산에서 입적하였는데 시호를 원종, 탑호(塔號)를 혜진(慧眞)이라 하였다. 이 비는 975년(광종 26)에 건립되었다. 비신은 현재 경복궁으로 이전되었고, 현재 사지에는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

진경대사 심희가 고달사를 떠난 뒤 창원에서 봉림산문을 개창할 때까지 약 50년간 고달사에 대한 기록은 자취를 감추었다가 찬유가 중국에서 돌아온 10세기 초에 다시 나타난다. 이처럼 고달사는 현욱-심희-찬유로 이어지는 봉림산문의 선종세력과 호족과의 관계, 특히 고려 왕실과의 밀접한 관계를 말해주는 대표적인 사찰이다.

고려시대 원종대사 찬유의 활동과 사상적 배경은 국사(國師)의 예우를 받으며 활약한 승려로서, 고려 광종대의 불교 교단의 정비와 사상의 통일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법안종의 성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광종대에 도입된 법안종은 교선일치를 내세우는 중국 선종의 일파로서 균여(均如)를 내세워 화엄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하려던 움직임과 함께 뒷날 광종의 전제정치 성립에 이바지할 수 있는 사상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고달사와 고려 왕실의 관계는 원종대사 찬유 사후에도 광종이 특별히 명을 내려 도봉원(道峰院)·희양원(曦陽院, 聞慶 鳳巖寺)과 함께 고달사를 삼부동원(三不動院)으로 삼고, 원종대사혜진탑을 건립하는 등 고달사는 고려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고, 이 시기에 크게 사세를 떨쳤을 것으로 추정된다.2)

선종의 선사들은 중앙의 지배층에서 몰락한 육두품 이하의 하급 귀족 출신이거나 중앙 진출이 불가능한 지방호족 출신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현재 나말여초에 선종 승려로 30인 정도의 비문이 전하고 있어 그 행적을 알 수 있는데, 그중 약 절반이 김씨이다. 아마 김씨가 아닌 나머지는 6두품 이하의 신분층에 속해 있었고, 김씨라 하더라도 왕족 출신이 아닌 선사들은 6두품 이하의 신분층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굴산사(崛山寺) 범일(梵日)의 조부인 술원(述元)이 명주(溟州) 도독을 지냈으며, 실상사 수철(秀澈)의 증조부는 소판(蘇判)을 지낸 진골이었다. 이들은 아마도 조부 때까지만 하더라도 진골이었으나 6두품으로 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성주산문을 일으킨 낭혜화상(朗慧和尙) 무염(無念)의 가계는 본래 무열왕계로서 진골 출신이었으나 그 부친 범청(範淸) 때에 6두품으로 떨어진 사례가 있다.

원종대사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6두품 출신으로 출가하여 중국에서 선종을 배운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사실은 고려 태조가 선종 승려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사실과 일치한다. 원종대사혜진탑는 당시 6두품과 선종 승려들의 활동 및 호족과의 관계를 시사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달사와 관련된 승려들의 행적을 통해 그 창건 시기를 추정해 볼수 있다. 고달사의 창건 사실을 전하는 기록으로는 『봉은사본말사지(奉恩寺本末寺誌)』,3) 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眞鏡大師寶月凌空塔碑),4) 홍각선사탑비문(弘覺禪師塔碑文),5) 『조당집(祖堂集)』6)을 들 수 있다. 이를 통해 8세기에 작은 암자에서 출발한 고달사가 9세기 중엽 이후에 들어서야 비로소 원감대사 현욱에 의해 중건과 수리가 이루어지면서 사찰의 모습을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7) 1998년부터 시작된 고달사지에 대한 발굴조사는 현재 4차 조사까지 마쳤다. 4차 발굴조사를 통해 8~12세기의 유구와 유물이 출토되어 초창기의 가람의 실태를 알 수 있게 되어,8) 문헌자료와 일치하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주지역은 뒤에서 살펴볼 825년 고달산 산적 수신(壽神)이 범문(梵文)의 반란 사건에 가담하였으나 곧바로 진압됨으로써 거센 탄압을 받았을 것이다. 피폐해진 여주지역에 840년 경 봉림산문의 개조인 고승 현욱이 고달사에 주석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당시 선종과 호족의 득세가 두드러진 시기에, 현욱의 고달사 주석은 미약한 왕권을 만회하려는 신라 왕실로부터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였고, 이는 고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9)

맨 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