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의 비상 여주시 여주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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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고대 삼국의 각축과 술천

『삼국사기』에는 4세기대 고구려·백제의 전투 기사는 390년(고구려 고국양왕 7년, 백제 진사왕 6년)까지 10회가 보이고 있는데, 375년 소수림왕 5년 백제의 수곡성(水谷城 : 황해도 신계)을 침입하여 함락시킨 사건을 제외하면 모두 백제가 우세를 보인 것으로 확인된다. 특히 371년 백제 근초고왕은 평양성 전투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킬 정도로 우위를 보인다. 당시 고구려는 서북방의 전연과의 대립으로 남쪽 백제에 대해 열세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와 고구려는 예성강을 경계로 하여 국경선을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 건국 초기에 보이는 말갈과의 격전지인 술천성(述川城)1)·술천(述川)2)을 여주 흥천면 일대로 보기도 한다. 이후 술천성은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다시 663년 고구려와 말갈의 연합군이 술천성을 공격하다 실패하였다는 기록이 있다.3) 위 사례로 보아 술천성은 말갈이 백제를 공격하는 데 주요 전략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술천성이 지금의 여주시 금사면 이포리와 외평리 경계의 산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4) 이곳은 남한강변에 위치하고 바로 건너편에 파사성과 주변이 한눈에 보이는 요새로 정상 부분에 토성의 흔적과 성돌이 남아 있다.

그러나 경기지역에서 신라유물이 출토되지 않고 순수하게 백제계 유물만 출토되는 성곽은 거의 토성이다. 포천 고모리산성, 파주 육계토성, 서울의 몽촌토성·풍납토성, 의왕 모락산성, 화성 길성리토성, 이천 효양산성 등이다. 그중에서 본격적인 판축토성인 풍납토성을 제외하면, 자연지형을 최대로 살리며 삭토(削土)하거나 성토(盛土)하는 방식의 토성 축조설이 한성기 백제의 전형이라고 한다.5) 이러한 관점에 비추어 앞으로 여주지역에서 종래 말갈을 방어하던 요충지인 술천성으로 알려진 금사면 이포리·외평리 성지는 정밀 학술조사를 통해 그 축성 주체나 성격에 대해 밝힐 필요가 있다.

이 시기 술천군 사람들의 단편적인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유적지가 조사되었다. 즉 여주 연양리유적에서는 원삼국~초기백제시대에 이르는 주거지(7기) 등이 조사되었다.6) 1995·97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2차례에 걸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원삼국시대 주거지 7기, 방형 유구 1기, 제철 관련 유구 2기를 비롯한 14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주거지의 대부분이 주민 이주 후 소실되어 폐기된 것으로 보이는데, 6호 주거지의 경우 주거하는 도중의 화재로 많은 유물이 남이 있는 상태이다.

주거지는 주로 평면 방형으로 장축 방향은 모두 강의 방향과 일치한다. 내부에서는 판석과 점토를 사용한 것, 점토만을 이용한 것 등 두 가지의 부뚜막 시설이 조사되었다. A-2호 주거지 내부에서 발견된 소형 노(爐)는 철기 생산과 관련되어 당시의 국가 발전 정도를 알 수 있는 유구이다. 조사된 주거지를 통해 한강 유역을 따라 펼쳐진 다른 유적과의 상호 비교가 가능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연양리 주거지에서 출토된 중도식(中島式) 토기7)는 풍납토성·하남 미사동·수원 서둔동(한강 하류), 춘천 중도·가평 마장리·이곡리(북한강 중상류), 충주 지동리·하천리·횡성 둔내(남한강 중상류) 등 인근 유적에서 확인된 출입시설이 있는 여(呂)자형 또는 철(凸)자형 평면, 부석형노지(敷石形爐址)와 함께 백제와 관련된 유적의 특징으로 이해되고 있다. 비록 연양리유적의 주거지에서 출입시설이 확인되지 않았지만, 좁은 조사 범위와 하천의 퇴적과 침식에 따른 유구의 파괴를 감안한다면 한강 유역의 여러 유적들과 함께 초기 백제의 대표적인 생활유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연양리유적의 주거지는 부뚜막 형식, 발달된 외반구연호, 경질토기의 증가 등으로 미루어 볼 때 3세기 중반에서 4세기 초로 편년을 설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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