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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삼국 형성기

철은 청동기에 이어 새로운 금속으로 발견되었다. 철을 최초로 이용한 예는 BC 4000년 경에 이집트에서 만든 철제구슬로 알려져 있다. BC 3000년쯤 서남아시아의 시리아, 바그다드 같은 지역에서 철의 정련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제련철로 이루어진 유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제철단검이다.

철을 녹이기 위해서는 1,000℃ 이상의 온도가 필요한데 인류는 제련기술이 발달되기까지 오랫동안 청동기를 사용하였다.

한국의 철기는 중국 전국시대 철기의 영향을 받아 성립되었으며, 초기에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주조쇠도끼[鑄造鐵斧]를 비롯한 농공구류가 많았다. 철기의 자체적인 생산은 B.C. 2세기경으로 보이는데, 이때부터 단조철기도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철기생산의 본격화 및 현지화, 제조기술의 발전은 다른 부분에까지 영향을 미쳐 새로운 토기의 출현, 생산력의 증대 등 사회 변화를 초래하였다.

한반도에서는 철기의 유입과 이미 정착되어 있던 발달된 청동기문화가 잘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초기 철기문화에 후기 청동기문화를 포함하여 B.C. 300년부터 기원 전후까지를 초기철기시대로 설정하고 있다.

이 시기에는 먼저 대동강유역에 요령지방과는 완전히 다른 한국식 동검, 가는 줄무늬 청동거울[細文鏡], 그리고 철제무기, 농구, 공구 등이 만들어졌다. 대동강유역의 이런 철기문화는 급속하게 한반도 전역으로 파급되었을 것이다.

이 시기는 Ⅰ식 한국식 동검, 가는 줄무늬 청동거울로 대표되는 Ⅰ기(B.C. 300~100)와 Ⅱ식 한국식 동검, 거여구(車與具)의 부장, 가는 줄무늬 청동거울의 소멸, 철기생산의 본격화 시기인 Ⅱ기(B.C. 100~기원전후)로 세분된다. 청동기에는 한국식 동검, 동꺾창[銅戈], 동투겁창[銅矛], 가지방울[八珠鈴], 기타 의기 등이 있고, 철기에는 도끼, 화살촉, 창 이외에도 괭이, 낫, 반달칼 등의 농구가 있다. 토기에는 덧띠토기[粘土帶土器], 검은 간토기[黑陶] 등이 있다.1)

위에서 설명한 철기시대와 관련된 문헌상의 자료는 고조선후기 사회에 관한 것을 비롯하여 진국(辰國), 부여에 대한 것, 위만조선(衛滿朝鮮), 삼한, 낙랑 등 한사군(漢四郡)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철기시대나 그 이후는 정치체(政治體)의 형성기로 문헌에 나타나는 고대 소국(小國)과 깊은 관계가 있다.2)

남한강 유역에 위치한 여주지역에서 고대국가적인 단계로 처음 등장하는 것은 진국이었다.3) 그런데 진국의 정체와 실체에 대하여는 아직까지 논란이 많다. 특히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백제의 건국에 있어 마한(馬韓)과의 관계는 기록이 있지만, 진국에 관한 것은 없다. 따라서 삼국이 정립되기 이전의 중·남부지역 초기 고대 사회에 대해서는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 기록된 마한,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바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경우에 여주지역에서 정치력을 행사하였던 초기국가 단계의 정치체는 마한으로 여겨진다.

『삼국지(三國志)』 「위지 동이전(魏志 東夷傳)」에 따르면 삼한은 79개의 소국이 정치연맹체를 이룬 집단이었다. 이 가운데 마한은 55개의 소국으로 구성된 연맹체였고 그 중심은 목지국(目支國)이었다. 그리고 마한 사회에 대한 중요 관심사는 55개의 소국의 위치를 알아내는 것인데 경기지역에는 원양국(爰襄國)·모수국(牟水國)·상외국(桑外國)·소석색국(小石索國)·대석색국(大石索國)·우휴모탁국(優休牟琢國)·신분활국(臣濆活國)·백제국(佰濟國)·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일화국(日華國)·고탄자국(古誕者國)·고리국(古離國)·노람국(奴藍國)·목지국(目支國)·자라모로국(咨離牟盧國) 등 15개의 소국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4)

한강의 중류지역에 위치한 여주지역에는 앞에서 언급된 어떤 소국이 존재하였을까? 일반적으로 지금까지는 고리국(古離國)이 이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 중심지는 현재의 흥천면 일대로 비정된다.5)

고리국의 중심지를 흥천면 지역으로 비정하는 근거로는 주변인 이천시 백사면 현방리에 20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하며, 여주지역에서는 대표적인 구릉성 평야지대이기 때문이다.6) 하지만 이런 판단의 근거는 고고학적 유적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좀더 심층적인 연구를 필요로 한다.

한편 여주지역에 초기국가 단계의 소국이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문헌적 근거는 술천국(述川國)이나 술천성(述川城)으로, 이곳의 중심지는 금사면 이포지역이다. 이곳에 술천성이 있었을 가능성의 근거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다.7) 이 책의 여주목 고적조에는 폐현(廢縣)으로 천령현(川寧縣)의 기록이 있는데 그 기원이 고구려의 술천군까지 올라가고, ‘성지매(省之買)’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여주는 조선초기에 천령현이라고 부른 독립된 군현을 통폐합하여 새로운 여주(목)로 재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천령현의 실체와 그 치소에 대하여 관심이 모아진다. 규장각에 소장된 여주읍지를 보면 현재의 이포리 지점에 천령고현(川寧古縣)이라는 기록이 있어 조선전기까지만 해도 이곳이 치소였음을 알 수 있다.8)

한편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온조왕 40년(AD 22) 및 초고왕 49년(214)에 말갈이 술천성, 술천을 공격해왔다는 기사가 있어9) 여주지역은 이 시기에 이미 백제의 영향권에 속해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런 점에서 이포지역에는 백제초기부터 술천(성·군)으로 부르던 하나의 소국(小國)이 있었고 그 본래의 명칭은 성지매로 추정된다.10) 또한 오늘날의 여주 중심지역에는 또 다른 별도의 소국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여주 중심지역의 소국으로는 삼국통일 과정에서 신라가 설치한 골내근정(骨乃斤停) 또는 골내근현(骨乃斤縣)이 주목된다.11)

여주지역의 초기철기시대 유적으로는 1995년 여주읍 연양리유적이 발굴된 것을 비롯하여 여주읍 능현리·단현리·신현리, 흥천면 신근리, 대신면 당산리·천서리, 강천면 가야리·굴암리·이호리·적금리 등지에서 유물이 수습되어 전역에 유적이 분포할 가능성이 많다.

연양리유적은 남한강유역에서 발굴된 대표적인 초기철기시대 유적 가운데 하나이다.

이 유적의 입지조건을 살펴보면 남한강 옆의 충적대지 위에 있으면서 주변에 낮은 야산과 배후습지가 있어 한강유역에서 조사된 중부지역의 다른 유적과 비슷하다. 지금까지 중부지역에서 발굴된 하남 미사리유적을 비롯한 가평 마장리, 춘천 중도, 이천 효양산, 충주 하천리, 단양 수양개, 파주 주월리, 수원 서둔동 가운데에서 이천 효양산은 강과 떨어진 산의 정상부에, 서둔동유적은 내륙의 나즈막한 구릉지대에 위치할 뿐 나머지는 모두 연양리와 같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12)

생업경제를 보면 이 시기의 유적에서 대규모의 벼농사 흔적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춘천 중도와 횡성 둔내리유적에서 조, 콩이 발견되어 잡곡 농경이 중심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당시 사람들은 배후습지 주변에서 약간의 벼농사와 충적대지에서 잡곡 경작을, 그리고 강에서 물고기잡이 등으로 살림을 꾸렸을 것이다. 특히 배후습지는 집의 지붕과 벽체를 만드는 주요한 재료인 갈대를 쉽게 많이 얻을 수 있는 곳으로 중요하며, 연양리유적의 집터에서도 불에 탄 갈대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집터의 긴 방향을 보면 부분적으로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유적 옆으로 흐르는 남한강의 방향과 나란한 상태다. 그리고 집터의 배치는 B지구의 경우 대략 10m 거리를 두고 나란히 자리하고 있어 의도적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었음을 알 수 있다. 평면 생김새는 긴 네모꼴이 4기로 제일 많고 네모꼴은 1기로 출입구 시설이 있는 凸자 모양 집터다. 이처럼 네모꼴 집터에 돌출된 출입시설이 있는 집터가 중부지역에서는 보편적으로 널리 발견되고 있다.

집터시설 가운데에는 6호에서 一자 모양의 구덩이가 발견되었는데 이런 것이 청동기시대의 집터에서도 나오며, 초기 삼국시대 유적으로는 이천 효양산유적, 영암 신연리유적, 순천 낙수리유적, 경주 황성동유적에서 조사되었다. 이런 구덩이의 기능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배수나 습기를 방지하는 시설로 해석한다. 그러나 연양리 6호 집터의 경우, 집터의 바닥은 배수가 잘되는 토양임을 고려할 때 이 구덩이의 기능은 벽체를 보완하기 위한 시설의 하나로 여겨진다.

화덕자리는 난방과 보온, 취사를 목적으로 설치하는 시설물이며 이 유적에서는 냇돌을 둥글게 돌린 위석식(圍石式)과 냇돌을 깔고 그 위에 찰흙을 덮은 부석식(敷石式) 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위석식 화덕자리는 집터의 평면 생김새가 둥근꼴인 7호에서만 확인되었다. 냇돌을 깐 부석식 화덕자리는 중부지역의 초기 삼국시대 집터에서 가장 널리 나오는 것으로 연양리유적은 2호, 6호, 10호, 11호 집터에서 발견되었다. 이 화덕자리가 발견된 집터는 모두 긴 네모꼴이며, 화덕의 위치는 집터의 북쪽으로 치우쳐 놓여 있었다. 화덕의 평면 형태는 둥근꼴, 타원형이며 만든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2호 집터의 화덕은 아래쪽에 토기 조각을 깔고 그 위에 화덕이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화력을 높이고 잔열을 오랫동안 지속시키기 위해 바닥의 습기를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화덕자리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찰흙 띠가 돌려져 있는데 이것은 불씨가 일정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한 일종의 방화시설로 여겨진다.13)

부뚜막 시설은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11호 집터처럼 판자돌과 찰흙으로 만든 것이고, 다른 하나는 12호처럼 찰흙으로만 만든 것이다. 이런 시설이 설치된 집터의 평면 형태는 긴 네모꼴과 凸자형이다.14) 부뚜막은 모두 집터의 북동 모서리 근처에 자리하며, 방향은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다.

연양리유적에서는 발굴 범위에 비하여 여러 종류의 많은 토기가 출토되었다. 집터 안에서 찾은 토기는 모두 99점으로 그 가운데 경질토기는 4점이고, 나머지는 모두 연질토기이다. 연질토기는 타날문토기와 무늬없는토기로 나누어지는데 타날문토기가 28점으로 무늬없는토기가 더 많다. 그리고 무늬없는토기 가운데 입술이 바깥으로 바라진 것은 약 2/3정도이고, 타날문토기 가운데 단지가 19점으로 많은 양을 차지한다.

연양리유적에서는 제철 유구가 발견되어 진천 석장리나 경주 황성동유적과 함께 초기 철기의 제작과정을 알 수 있어 중요하다.

철 생산은 크게 제련 과정, 용해 과정, 단야 과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15) 이 유적에서는 제련과 용해 과정의 유구는 찾을 수 없고, 단야 과정과 관련된 작은 화덕 2기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50㎝ 안팎의 타원형인데 2호 집터의 것은 2회 이상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화덕 바닥에는 매우 높은 온도에서 나타나는 철의 함유량이 많은 찌꺼기와 거의 유리질화된 노벽이 남아 있었다.

철의 생산에는 많은 과정과 재료, 작업에 필요한 공간, 고도의 기술을 가진 집단이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연양리유적은 주거 공간으로 여겨지며, 집터 안에서 쇠날, 쇠칼 등 아주 간단한 철제 생활 도구만 발견되기 때문에 이곳에서 살림을 꾸린 사람들은 철기를 생산·제작하는 전문 집단이 아니고 살림터에서 단야 관련 화덕을 이용하여 간단한 연모를 제작하던 사람들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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