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의 비상 여주시 여주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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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내륙수로 교통과 나루터

한강은 근대 교통기관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중부지방의 대동맥 구실을 해왔다. 한강은 중부 내륙지방과 한양을 연결하는 교통로로 조선시대의 자원과 인재의 보고였던 영남지방과도 연결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고려·조선조 1,000년 동안 한강은 전국 제일의 조운로로서 왕국의 정치, 경제적 통합에 기여한 바 크다. 한강로에 입지한 여주는 강폭이 200간으로 넓으며 수심도 깊고 잔잔하여 이호(梨湖)라 칭하였는데, 여말과 선초까지 거의 1세기 동안 왜구의 피해 때문에 해로가 막히자 육로를 거쳐 한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조세를 수송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때에 전세(田稅)의 분산처리를 위하여 여주목에는 3개의 수조처(收漕處)가 있어 경창직납지(京倉直納地)이기도 하였다. 읍 동쪽 10리의 강변에 설치된 오음포창은 옥천 등의 충북 내륙 6개 군으로부터 전세를 받았고, 읍내의 퇴평포창에는 여주 음죽과 청안의 것이, 이포는 이천, 죽산과 진천의 것이 수납되었다. 그러나 조선 세조 때에 해운이 정상화되자 육로수송의 불편함 때문에 여주 수조처는 폐쇄되었다. 조운제가 확립되고 나서 조운참이 설립되었는데, 여주목에는 이포참, 양화참이 설치되어 각 참에 수부(水夫) 30호와 참선(站船) 15척이 배치되었다. 참선에는 사공 1명과 격군 2명이 승선하였고, 수부들은 화물의 선적과 수로정비의 책임을 맡았다.

수참수부들은 조정에서 수시로 징발한 수로에 익숙한 양인(良人)들이었다. 초기에는 조정에서 이들을 양역인 군역(軍役, 軍船)으로 조운에 종사토록 하였는데, 점차 역민(驛民) 등과 함께 칠선천역(七船賤役)의 하나인 수참간(水站干)이라 불렸다. 조선 후기에는 이들을 다시 군역인 수참수부보(水站水夫保)로 확보하였으며 그 수도 전기보다 증가하여 여주(이포)에 45인이 배치되었다. 20세기 초까지 이들은 지정된 장소에 거주해 왔으며, 이포의 수부촌은 천민취락처럼 인식되기도 했다.

여주읍에는 읍 자체의 전세를 수납하는 양화창이 하천변의 교통요지에 입지하였다. 그리고 이포는 사상(私商)과 선운업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남한강의 수운은 일제강점기 이후 수려선과 도로가 건설됨으로써 쇠퇴하기 시작하여 팔당댐이 완공되었던 1974년에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다음으로 한강수로 항행일수의 기록을 보면, 계절에 따라 수량, 수심, 풍향 등이 바뀌고 선적화물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일정하지 않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여주에서 한양까지 하행일수는 2일이 소요되었다고 하였는데, 한강변 현지주민들의 조사에 의하면 서울에서 여주까지는 소강하는 데 5일이, 하행하는 데는 2일이 소요되었다 한다. 한편 19세기 말 영국의 지리학자 비숍(I.B. Bishop) 여사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여주까지의 소강일수는 5일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20년에 일본인의 조사에 의하면 여주까지 소강하는 데 8일, 하행하는 데는 5일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한강 기항지의 선척수(船隻數)를 보면 19세기 후반 여주목의 토선(土船)은 45척으로 봄과 가을에 37량 75전의 선세(船稅)(한 척당 약 0.84량)를 상납하였다.

여주목에 분포한 진도(津渡)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우만포를 포함하여 3개가, 『여지도서』에는 9개가, 『대동지지』에는 6개가 입지하였다.

다음으로 여주목의 한강변에 입지한 다리는 관찬지(官撰誌)인 『여지도서』에 청민천교(淸泯川橋), 대교(大橋), 신은천교(莘隱川橋), 신은천교(新恩川橋), 억억교(億億橋) 5개가 입지하였다. 그 후 『대동지지』에는 천민천(天民川), 대교, 억억교 3개가 입지하였다. 청민천교는 『여지도서』에서는 여주읍에서 남쪽 30리에 입지한다고 기술되어 있으나 『대동지지』에는 남쪽 35리에 위치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대교는 『여지도서』에서는 여주읍에서 서쪽 20리에 입지한다고 기술되어 있으나 『대동지지』에는 서쪽 25리에 위치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억억교(億億橋)는 『여지도서』에서는 서쪽 30리에, 『대동지지』에서는 북서쪽 30리에 입지한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우리는 관찬지의 기술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할 것이다.

여울로는 『대동지지』에는 마탄(馬灘)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마암지전(馬岩之前)에 위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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