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의 비상 여주시 여주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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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전국 생활도자기 산업의 메카

여주시 총사업체조사에 따르면 도자기 사업체수로 볼 때 여주시가 지역 산지로는 전국 최대의 규모이다. 도자기 산지로 알려진 인근 지역과 비교해 볼 때도 여주지역에서는 도자기 산업이 전체 제조업 중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증가세에 있어서도 매우 두드러지는데 1986년에는 여주, 이천, 광주 세 지역이 큰 차이가 없었으나 10년 후인 1996년에는 업체수로 볼 때 여주는 광주의 4배, 이천의 2배가 되었다. 여주지역에서 활동하는 도자기 사업체들은 규모가 영세하고 미등록된 것이 많아 실제로는 약 600여 업체라고 할 수 있다.

여주지역의 도자기 업체들은 오학동에 집중되어 있다. 도자기 산지의 중심 지역인 오학동과 현암동에는 도자기 원료가 되는 심층 풍화토의 백토, 도토, 점토가 생산되는 싸리산이 있다. 여주지역은 화강암 지대인데 화강암은 화학적 풍화에 약하여 심층 풍화토가 생성된다. 풍화토에 함유된 점토는 건조하고 습함에 따라 심하게 부피가 변하지 않기에 점토를 반죽하여 성형한 후 1,300℃로 굽는 공정을 거치는 도자기 제조에 유리한 조건을 갖는 토양으로 여주, 이천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여주나루의 맞은편이었던 오학동은 인근 싸리산에서 생산되는 도자기 원료를 광주 분원(1652년 설치)까지 실어 내가는 집적지였으며, 도자기 원료 산지인 영월, 충주, 청풍 지역에서 실어오는 원료들이 남한강 수운을 이용하여 광주 분원에 운송될 때의 주요 거점이기도 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여주군 북내면 관산(현재 여주시 현암동)에서 중품의 도자기를 생산했고 여주군의 서쪽에서는 하품의 도자기를 생산했다는 기록이 있고, 1910년대의 『조선산업지』에는 여주의 3개 도요지로 금사면 궁리, 북내면 오금리(현재 여주시 오금동), 강천면 가야리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여주 일대에는 옹기가마가 도처에 분포하여 남한강 수로를 타고 상하류 각지에 수송되었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서도 자기와 도기를 여주의 특산물로 꼽았으며 도자기 공업은 상당수의 사장(私匠)을 수용하여 여주지역의 도회화에도 기여하였다. 분원이 폐지되면서는 도자기 원료 구입에 불편을 느낀 3명의 도공이 오금동에 옮겨오면서 여주 지역에서도 본격적인 도자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후 1920년대에 일제에 의해 전신주용 애자와 일반 서민용 생활자기를 만들던 조선도자기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해방 후 조선 도기가 해체되면서 이들 종사자들을 중심으로 오금동과 현암동 등지에서 가내 수공업 형태로 명맥이 유지되어 왔고, 도자기 원료 산지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는 외지인들이 들어오기도 하였다. 1970년대 이후 가내공업 형태였던 도자기 공장들이 증가하게 된 것은 일본과 유럽지역으로의 수출이 활발해지면서이다. 이로 인해 여주시는 우리나라 전통도자기를 재현하는 우리나라 3대 요업지 중의 하나가 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공장의 증가가 두드러졌는데 국민의 소득 수준 향상에 따른 도자기의 국내 수요 증가와 생산설비의 발달에 따른 품질 개선 및 양산 체제로의 전환과 올림픽 특수를 계기로 한 우리 전통 상품에 대한 홍보 때문이었다고 본다. 특히 1980년 중반 이후의 법적 규제완화 조치인 특화 산업으로의 인정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1980년대 후반에는 교통 체계의 향상으로 인한 서울과의 접근성이 향상되고 여주의 대표적 관광지였던 영릉과 신륵사를 찾는 관광객들이 도자기의 소비자로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의 왕래가 빈번한 교통로를 따라 도자기 공장과 판매장들이 증가했다. 여주 도자기의 주된 품종은 생활 도자기로 전체의 59%를 자치한다. 따라서 여주지역을 생활도자기 중심의 도예 산지로 보고 있는 것이다. 여주지역이 짧은 시일 내에 최대 도자기 산지로 부상한 데는 큰 기술이 필요하지 않는 생활도자기가 중심이었던 점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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