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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조선후기 개화기

여주의 강한사(江漢祠)는 1871년 3월20일 서원철폐 때 유일하게 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다. 서원철폐 때 경기지역에서 철폐를 면한 서원은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용인의 심곡서원(深谷書院),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 여주의 강한사(江漢祠), 강화의 충렬사(忠烈祠), 광주의 현절사(顯節祠), 김포의 우저서원(牛渚書院),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 과천의 사충서원(四忠書院), 의정부의 노강서원(鷺江書院), 양성의 덕봉서원(德峰書院), 고양의 기공사(紀功祠)였다.

조선후기 이후 여주목은 능침(陵寢)을 관리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조세가 번잡하고 무거워, 조정에서는 여주목의 세를 상정값으로 대신 바치게 하는 등 약간의 특혜를 주었다. 여주는 이후 영릉과 녕릉을 관리하는 고장으로, 이곳의 공사나 관리와 관련된 일들이 많아서 조세에 대한 대납을 돈으로 내게 하도록 했다. 또한 조정에선 관리들에게 능 관리감독에 따른 상도 내렸다.

조선후기는 또한 전정·군정·환곡의 행정을 둘러싼 정치부패가 심해 농민봉기가 빈번했다. 1885년의 여주민란 또한 아전이 공전이나 군포를 축내고 그것을 메우기 위해 결사를 정액 이상 받은 도결 문제로 발생했지만, 여주목의 향리 윤보길이 퇴임 전 저지른 오랜 부정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었다.

항일의병전쟁과 여주지역의 활동상은 다음과 같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자극된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키자 농민들은 이에 합세했다. 전국적으로 봉기한 의병 중 1896년 1, 2월에 걸쳐서 경기도에서는 광주, 여주, 이천, 용인, 시흥, 과천, 안산, 남양, 수원, 안성, 죽산, 포천, 양근, 지평, 양주, 연천 등지에서 의병활동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광주와 여주의 의병활동이 가장 활발하였다. 여주의병은 초기부터 크게 활동을 벌였는데 여주의병은 사과(司果) 심상희(沈相禧)를 대장으로 하였다. 여주의병은 2월 5일 여주장날을 이용하여 수백 명이 일어나서 전선을 끊고 일본인들을 살해하는 등 직접 행동을 시작하였다. 이 세력은 여주는 물론 충청도지역으로도 진출하였고 또 광주, 이천, 제천 등지의 의병들과 연합전선을 형성, 크게 기세를 올렸다.

정미(丁未)의병 항쟁기인 1907년 8월 10일 여주의병들은 한강을 항행하는 일본 목선을 습격, 일인 20명을 총살, 적재화물을 노획하였고 1907년 8월 12일 여주의병은 일경 9명과 교전, 2명을 사살하고 여주읍을 점령하였다.

1907년 8월 12일 여주, 장호원, 죽산, 이천, 양평 등 남한강 연안 일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1907년 8월 12일 여주의병은 이날 여주읍을 점령하였다.

『대한매일신보』 8월 15일자에 “1907년 8월 15일 여주군에서 동쪽으로 20리 떨어진 안창(安倉)에서 의병(義兵)이 일본선(日本船)을 습격 2명을 포착(捕捉)하였다”고 하였다.

1907년 8월 24일 일본군 여주수비대 후원으로 이포를 역습, 부근 촌락을 소각시키고 이에 1907년 9월 김봉기(金鳳基)의 의병 400명이 여주의 일병과 교전,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1907년 10월 3일 일군경이 여주군 암퇴리 민가90여 호를 방화 소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황성신문』 1907년 12월 8일자에 “1907년 12월 8일 여주군 강천(康川)에서 의병 200명이 와서 군자금을 요구”했다고 한다.

1908년 3월 17일 의병 30여 명이 여주군 강천면을 공격, 2명을 총살하였고, 1908년 4월 11일 의병 30여 명이 여주군 근남면에서 원주로 이동하였다. 1908년 4월 23일 의병 10여 명이 여주군 지내면 면장 집을 습격하였으며, 1909년 1월 11일 의병 5명이 여주군 가서면 태평동 김영조 지화선가(金永祚 池化先家) 등에서 군수금을 모금하였다.

『대한매일신보』 1909년 1월 19일자에도 “1909년 1월 11일 여주군 내에서 의병 10여 명이 음죽군(陰竹郡) 일본 헌병분견소 상등병 및 보조원과 교전”한 것으로 되어있다.

1909년 1월 12일 여주 지역 의병 4명이 이천군 호면 한공오 집에서 군수금 모금활동을 벌였으며 1909년 1월 16일 여주 지역 의병 7명이 등신면 박용준 집에서 군수금을 모금하였고, 1909년 2월 12일 여주 지역 의병 7명이 금사면 김재두가(金在斗家)에서 군용금을 모금한 후 1909년 2월 경기도 의병들이 인천, 개성, 양주, 여주경찰서 관내지역을 98차례 공격하는 전투를 전개하였다.

『대한매일신보』 1909년 3월 2일자에도 “1909년 3월 2일 여주군 각 면에 의병이 창궐하여 군수전(軍需錢)을 수렴하는 고로 인심이 흉흉하다”고 하였다.

1909년 8월 29일 의병 10명이 여주군 가서면 태평동을 내습(來襲)하였으며, 1909년 8월 조인환 의병부대가 여주, 이천에서 기병(起兵), 1909년 9월 22일 의병 6명이 여주군 금사면 송현 강소사 집을 내습하였으며, 1909년 9월 24일 의병 7명이 여주군 도계면 매류동 박순국 집을 내습하여 군수금 1,200원 요구 및 현금 24원을 탈취하였다. 1909년 10월 11일 의병 3명이 여주군 금사면 장흥 변긍윤 집을 내습하였고, 1909년 12월 4일 의병 10명이 여주군 근동면 흔암리를 내습하였다. 1909년 12월 25일 의병 8명이 여주군 하서면 태평동 정중천 외 2호(戶)를 내습하였으며, 1909년 12월 27일 의병 12명이 여주군 가서면 태평동을 내습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 1910년 1월 24일 의병 4명이 여주군 길천면 오근리 면장 집을 내습하는 등 활발한 의병항쟁을 벌였으며, 1910년 4월 29일 의병 5명이 경기도 여주군 등신면 재가동(才加洞)에서 일본인을 습격하여 물품을 탈취하였다. 1910년 5월 4일 의병 5명이 여주군 금사면 백자동(柏子洞)을 내습하였고, 1910년 5월 8일 의병 8명이 여주군 대송면 도롱리(道弄里)를 내습하였다.

이와 같은 보도내용은 정미의병 항쟁기인 1907년에서 1909년까지 여주지방에서 일어났던 의병활동의 단편적인 기록들이다.

경기의병장 김하락(金河洛)은 여주의병장 심상희와 의논하여 여주의병의 일부를 거느리고 남한산성전투에 참가하였는데 이때 남한산성 의병부대의 다수를 차지한 것이 여주의병이었다. 여주의병장 심상희가 각 지역의 의병부대와 합군(合軍)하지 않고 따로 지휘권을 행사할 정도로 주체세력이었던 것이다. 2차 의병항쟁기인 1907년 8월 10일 여주의병은 한강을 항해하는 일인 목선을 안창(安倉) 강변에서 기습하여 일인 20명을 총살하고 적재화물 일체를 노획하였다. 2일 뒤 여주의병은 여주읍을 포위하여 일경 9명과 3시간을 교전, 2명을 사살하고 여주읍을 점령하였다. 여주읍 점령의 전과는 서울-원주 간의 연락을 차단하였고 계속해서 음죽, 장호원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각 지역에서 고립상태에 빠진 일본군을 구출하기 위해 군대를 증파하였다. 이 증원소대들은 여주 장호원과 이천 부근에서 의병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이때부터 일본군의 야만적인 방화·살육작전이 실시되어 여주, 지평, 양근, 원주 간에 백성으로 죽은 자가 3,000여 명이고 촌락과 백성을 살육하는 초토화작전이 있었다고 『매천야록(梅泉野錄)』은 기록하고 있다. 군대해산 이후 항일의병운동이 전 민족적 투쟁으로 격화되고 전국적 규모로 확대되면서 마침내 서울 진격을 목적한 연합전선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때 13도 총대장으로 추대된 의병장이 여주 출신 이인영(李麟榮)이었다. 전국의 의병대장이 인솔하는 약 1만여 명이 당시 양주(지금의 구리시)에 집결 서울 30리 밖까지 진출했으나 실패했던 역사의 기록이다.

1919년 4월 1일 이포(梨浦)에서 3,000명이 모여 이포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고, 4월 3일에는 여주군의 각 면에서 동시다발적인 시위가 있었다. 대신면 윤촌리에서는 50여 명의 동리민들이 황재옥(黃在玉)의 주도로 만세시위를 벌였다. 북내면 천송리와 당우리 주민들의 시위가 있었고, 신륵사 승려 인찬(仁瓚) 김용식(金用植)은 천송리와 당우리의 권중순(權重純), 조규선(曹圭善), 조근수(趙根洙)들에게 만세시위를 권유, 200여 동리민들이 한강대안에 이르러 태극기를 들고 만세삼창을 외쳤다. 한편 북내면에 사는 경성공립농업학교 학생 이원기(李元基), 원필희(元弼喜)는 심상의(沈相義), 이원문(李元文), 조경호(趙經鎬)등과 의논하여 4월 5일 장날을 기해 시위키로 하여 최영무(崔永武), 강두영(姜斗英), 강만길(姜萬吉), 최명용(崔明用) 등과 함께 북내면 당우리 공북학교 마당에 800여 명이 모여 여주읍내로 행진, 여주분견소에서 시위를 하였다. 이날 개군면 곡수에서도 3,000여 명의 시위가 있었다. 3·1운동 시위참가로 체포된 여주군민은 북내면 천송리, 당우리의 47명, 신암리, 오금리, 현암리에서 45명이었다. 이들 체포된 사람들 중 대신면 윤촌리의 황재옥은 징역 8개월, 신륵사 승려 김용식은 1심에서 징역 2년, 항소심에서 징역 1년이 선고되었다. 그리고 이원문, 이원기 등은 징역 10개월에서 1년 6개월이 선고 되었다. 주내면 상리의 조병하(趙秉夏)는 독립시위를 선동했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되어 징역 1년에 처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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