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의 비상 여주시 여주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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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조선시대

1389년(공양왕 원년) 여흥군으로 강등된 여주는 조선왕조에 들어서 1401년(태종 원년)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의 내향이므로 다시 부로 승격되고 음죽현(陰竹縣) 북쪽의 어서이촌을 떼어 붙여서 영역이 확장되었다. 그리고 1413년(태종 13) 계림(鷄林), 평양 등이 유수부(留守府)로 부르기 때문에 그 곳과 구별하기 위하여 도호부(都護府)로 명명하게 되었다. 이때 여주도호부는 충청도에 배속되어 있다가 경기도로 이속되었다. 원래 고려 말의 경기도는 개성을 중심으로 근경(近境)을 영내(營內)로 하였던 것이나 1390년(공양왕 2)에 비로소 경기를 나누어 경기도의 동남쪽을 좌도, 서북쪽을 우도라 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 평주(平州)·수안(遂安)·곡주(谷州)·재령(載寧)·서흥(瑞興)·신은(新恩)·협계(俠溪) 등을 황해도로 붙이고 나머지를 좌·우도로 개편하여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를 두었다. 태종 초에 좌·우도를 합쳤다가 다시 연안(延安)·배천(白川)·우봉(牛峯)·강음(江陰)·토산(兎山)을 황해도로 이천을 강원도로 붙이고, 충청도에서 여흥·안성·양지(陽智)·양성(陽城)·음죽과 강원도에서 가평을 편입시켰다. 세종 때에 철원과 안협(安峽)을 강원도로 붙이게 되어 평택을 제외하면 오늘날의 경기도의 관할구역과 거의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다.

1469년(예종 원년)에 여주는 광주 서쪽 대모산(大母山)에 있던 세종대왕의 능을 부(府)의 북성산으로 옮기게 되자, 천령현을 없애 여주로 병합시키고 지금의 명칭인 여주로 개칭하여 목(牧)으로 승격한다. 당시 여주에 병합된 천령현은 이미 언급한 대로 원래 고구려 때에는 술천군 또는 성지매(省知買)라고 하였는데 신라 경덕왕이 기천이라 고쳤고 1018년(고려 현종 9)에 광주에 소속되었다가 뒤에 감무를 두었다. 조선 예종 때 고을을 없애고 여주에 병합시켰다. 천령현은 여주의 한강유역 고대 연혁의 중심지역으로 지리적 위치에서도 부각되고 있는 지역이다. 조선시대 여주는 지방 행정단위로 태조, 정종 때의 군(郡), 태종 때의 부(府), 그리고 예종 이후의 목(牧)으로 변형되었다. 여주가 지방행정단위의 부(府)인 경우에는 도호부사(都護府使 : 종3품), 유학교수관(儒學敎授官 : 종6품)이 있었고 목(牧)인 경우에는 목사(牧使 : 정3품), 판관(判官 : 종5품), 교수(敎授 : 종6품)가 각 1인씩 있었다. 여주지방의 최고 지방관은 부윤(사)(府尹(使)), 목사(牧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 관찰사 예하의 지방관을 총칭하는 것이었다. 수령은 목민의 관(官)으로서 그들의 행정적 치적은 민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 선임에 신중할 뿐 아니라 임명 후 감독도 철저하였다.

수령의 임기는 1,800일(5년)로 이들의 임무는 농업의 장려, 호구의 확대, 공부(貢賦)의 징수, 교육의 진흥, 군정의 수비(修備), 부역의 균등, 사송(詞訟)의 간결, 향리의 부정방지 등으로 그중에서도 자기 지방에 할당된 공부의 징수·상납(上納)은 국가재정의 근본이므로 수령의 임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관찰사는 이를 기준으로 해서 수령의 고과표(考課表)를 만들어 선(善)·최(最)·요(要)·전(殿)의 4등급으로 나누어 1년에 두 번 보고하게 하였는데 이것을 전최(殿最)라 하여 수령의 승진과 폐출에 영향을 주었다. 여주는 경우 향교의 교생(校生)지도를 담당하는 교수를 두었다. 교수는 지방의 교학을 책임지고 있었으며 문신으로 임명하였다. 세종 이래 연해, 국경 등 중요지점에 영진(營鎭)을 두었던 지방 방위조직은 내지(內地) 주현의 방어가 소홀한 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단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군사상으로 편제를 재정비하게 되었는데 세조 때 국경지대인 평안도 함길도에 설치되었던 군익도(軍翼道)의 체제가 전국적으로 확장 조직화될 때 여주지방은 광주도(廣州道)의 좌익(左翼)에 속하였다. 그리고 1457년(세조 3) 진관체제(鎭管體制)로 전환된 후 여주는 양근, 지평, 천령, 음죽, 죽산, 이천, 양지, 용인과 함께 광주진(廣州鎭)에 속하였다.

1466년(세조 12)에 개정된 경기도의 진관세성표(鎭管細成表)에 보면 각 관의 수령이 절제사 이하를 겸하는 원칙이었고 각 도에는 병마절도사(종2품)를 두어 도내 육군의 지휘권을 장악하게 했다. 이것을 주진(主鎭)이라 하였고 주진 아래는 목사(정3품)가 거의 겸직하는 첨절제사(僉節制使)가 거진을 단위로 하는 진관의 군사권을 장악하도록 했다. 조선조 관직 기록에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가 군수의 관직에 부기되는 것은 말단의 여러 진은 군수 이하가 동첨절제사의 직을 맡아 수행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경국대전』 병전(兵典), 외관직(外官職)에 보면 당시 광주진관(廣州鎭管)은 광주목사가 첨절제사(僉節制使)를 겸하였고, 여주목사는 동첨절제사, 절제도위(節制都尉)에는 여주판관이 겸했다.

민족사의 최대 국난이었던 16세기 후반 임진왜란 때 여주는 한강유역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으로 국난극복의 현장이 되기도 하였다. 1592년(선조 25) 5월 강원도조방장(江原道助防將)인 원호(元豪)는 고향인 여주로 돌아왔다. 그는 향병(鄕兵)을 소집한 뒤 한강 중류 여강(驪江) 벽사(壁寺 : 신륵사)에 진을 치고 나루를 건너 왕래하는 왜적을 차단하였고 그들의 장물(裝物)을 빼앗아 임금의 피난지인 행재소(行在所)에 보내기도 하였다. 이후 6월 10일 원호는 구미포(당시 여주군 개군면 구미리→현 양평군 개군면 구미리)에 둔진(屯陳)한 적이 민간에 들어가 가재를 약탈하고 군량 등을 강제로 조달하고 있다는 급보를 받고 여주의 주병(州兵)을 소집하여 새벽에 이들의 둔진을 엄습, 왜병 50여 급을 참수하는 전과를 올렸다. 남은 적이 도주하였고 이로부터 왜적은 여주에 들어오지 못하였다. 이 전공으로 원호는 여주목사 겸 경기·강원도 방어사로 승진되었다. 경기·강원도 방어사 원호는 구미포에서 승리를 거둔 후 여주 관내 마탄(馬灘)에서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는 왜적의 동태를 듣고 이천부사 변응성과 합동작전으로 이들을 섬멸, 서울로 진격하려는 적의 통로를 차단시키는 성과를 얻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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